노아: 4년간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진심으로 고군분투하는 탐사자를 짝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붙잡기에는 너무나 멀고, 바다에서 더욱 행복할 사람이기에 고백 한 번 못하고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며칠 뒤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기에, 탐사자에게는 미련을 떨치기 위해 일부러 차갑게 대하려고 합니다. (...를 의도했는데, 로그를 다시 읽어보니 그냥 투정부리는 걸로 보이네요;)
PC: 아마 노아를 싫어하거나 데면데면하진 않을 거 같아요. 엄청 친한 친구까지는 아니지만, 만나면 인사도 하고, 어느 정도 잡담도 하고 그런 지인 사이 정도가 될 거 같아요.
그 와중에 엄청바쁘지 않으면 매일 콜드 슬립에 빠진 슈슈를 만나러 가다가, 막상 해석(아직 해석만 할지 전투도 겸할지 정하지는 못했는데, 아마 전투까지 도와주는게 슈슈가 빨리 일어날 확률이 높다고 했으면 분명히 할거예요.)등의 너무나 바쁜 일로 슈슈를 만나러 못 가게 된다거나 또는 때때로 노아 보면서 아마 슈슈가 건강했다면 저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말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인 걸 알지만 가끔 드는 그런 생각을 못 멈추고, 그날은 슈슈가 잠들어있는 곳에 가서 기기에 기대 앉아서 밤샐 거 같아요.
시아록:아냐. 그렇게 무리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바쁜 건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좀 자니까 낫다. (슬쩍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기지개를 켰다. 꿈은 어째 찝찝하지만, 마음속에 담아두기로 한다.)
노아:음, 알겠어요. 그래도 갓 입단하셨을 때보단 나아지셨으니 괜찮은 거라고 해야 하나...
그 땐 정말 과로로 같이 병원 신세 지게 되시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오늘은 뭐 하다 오셨어요? 역시 브리니클을 격파하러?
아, 그 말에 골렘을 생각하자 가벼운 두통이 번집니다. 지긋지긋한 돌덩어리들…….
시아록:그랬나...? (당신이 얘기하는 초반에 관한 건 잘 모르겠다. 그저 계속 마음이 초조했다.)
응. 브리니클 해치우고 왔어. (아까보단 낫다고 하지만, 떠오르는 돌덩이들에 피곤함과 짜증을 담아 뒷목을 주물렀다.)
노아:그랬죠. 그 때 이오리씨께 단단히 혼나시고 나서야 정신 차리셨잖아요...
시아록:그래도 그정돈 아니었어.. (괜히 민망하다.)
노아:요즘엔 브리니클도 이가 빠졌죠? 해변에서 올라오는 것도 얼마 되지도 않고... 이번에 비행선 타고 아예 본거지를 침공해버리면, 정말 다시는 브리니클을 볼 일이 없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좀 힘내세요. (마찬가지로 어디선가 일하다 왔는지 어깨를 쭉 편다)
대충 시간을 보내며 숨을 돌리다 보면,
이오리:시아록?
시아록:네?
이오리가 당신을 부릅니다. 드디어, 병문안 시간인가 보네요.
이오리:네 차례잖니. 추울 텐데 얼른 들어오렴.
시아록:네. (어느새 이렇게 짧아졌나. 대답을 하고 병실로 들어간다.)
슈테른의 병문안
이오리가 부르는 대로, 몸을 툭툭 털고 병실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우우웅, 큰 소리를 내는 콜드 슬립 기계를 마주합니다.
그 안에 떠오른 그리운 얼굴이 당신을 반깁니다.
슈테른:......
...그게 표정이나 반응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요.
슈슈였다면 분명 고생했다며 맞아 주었겠죠.
하지만 그의 손발은 차갑게 굳어, 당신을 끌어안아 줄 수 없습니다.
기계 안에 꽁꽁 갇혀 있어 나올 수도 없지요.
그래도 분명히... ‘살아서’ 이곳에 존재합니다.
언제나처럼 유리 너머로 손을 겹치고, 인사를 남길까요.
시아록:(기계 안의 잠든 것 같은 너를 빤히 쳐다보았다.) 슈슈.. (이렇게 부른다고 들릴 확률은 한없이 낮지만, 그래도 살아있으니까. 마을과는 상황이 다르니까..) 나, 열심히 하고 올게.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평소처럼 유리 너머에 손을, 그리고 이마를 겹치고 너에게만 들리길 바라며 작게 속삭였다.)
4년이라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 병실의 구조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느 날과 변함없이 당신과, 잠든 슈슈만을 담고 있습니다.
콜드 슬립 기계 안에서는 시간조차 얼어붙은 채입니다.
그건 당신 주위의 모든 것이 바뀌어가지만, 슈슈만은 그대로라는 뜻이죠.
애석하게도 당신 또한 예외가 되지는 못합니다. 벌써 우리의 나이가 네 살이나 벌어졌다니,
24살의 당신을 본 슈슈는 뭐라고 말할까요...
다시 깨어나도, 그의 반응마저 전과 같을까요.
당신을 보고도 그저 기뻐해줄까요...
시아록:(많은 사람들에게 들었다. 그 많은 앞으로의 상황과 변화, 그리고 서로 다르게 흐르는 시간들과 그리고 너와 나의 사이, 그 모든 걸 합해도 나는 그 무엇보다도 네가 깨어난 걸 무엇보다도 기뻐할 터다.)
그를 깊은 잠에 빠트린 건 미안했을지언정 후회스럽지는 않습니다.
그 끝에 함께할 수 있는 미래가 있다면, 지금 힘든 게 차라리 나을 테니까요.
물에 잠긴 건 슈슈지만, 당신 또한 바다에 빠진 듯합니다.
그리움과 슬픔, 애틋함, 죄책감, 고마움... 그 모든 게 색색의 산호처럼 자리한 바다 말이에요.
그렇게 몇 분을 수몰해 있었을까요? 이오리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의자에 앉습니다.
이오리:(차트를 뒤적거리며) 너도 알겠지만, 슈테른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어.
그는 손끝으로 겹쳐진 종이의 틈을 벌려 슈테른의 차트를 찾아냅니다.
시아록:정말요? (번쩍 고개를 들어 밝은 목소리가 되물었다.)
그 위에 그려진 그래프는 슈테른의 건강 상태로,
최근 들어 크게 향상되며 유의미한 수치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오리:(자신 있게 끄덕거리고는) 긴가민가했는데, 이제 확실해.
슈테른은 브리니클의 수가 줄어들수록 건강해지고 있어.
봐, 눈에 띄게 괜찮아지기 시작한 시기. 원거리 대포 도입과 맞물려.
시아록: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당신이 보여주는 차트를 살펴봤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과는 다르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자신은 많이 자랐다. 이런 도표만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다음에 본거지만 정리된다면.. (그것으로 끝이길 바라지만, 그저 기대가 실망이 될까 말을 끝맺지 않았다.)
이오리:맞아. 어쩌면, 정말 어쩌면 말이지.
이대로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별다른 해결 방법을 찾을 필요 없이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시아록:그럼 좋겠어요. (말 속에 간절한 바람을 담은 채로 상대에게는 가볍게 들리도록 이야기했다.)
이오리:그리고 이거. (다시 파일을 뒤적여 건강검진표를 한 장 꺼내든다)
네 검진 결과야. 역시 지상에 정상적으로 적응하고 있고,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이네.
체온이 평균보다 낮기는 하지만, 이것도 크게 심각한 수준은 아니야. 저체온증 증상도 나타난 적 없고.
시아록:아, 정말요? 그럼 된 거죠. (정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의 건강함은 자신도 느끼니 딱히 그렇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오리:그래.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거야.
격려하듯 얹는 말의 무게는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이오리:자, 슬슬 병원 문도 닫아야 하니까 이만 가 보렴.
오늘은 숙소에서 잘 거지? (따라나오라는 듯 방을 나서며)
시아록:음, 네. ( 슬쩍 콜드캡슐을 바라보고, 이내 당신을 따라 나선다.)
병문안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면, 노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잡지를 뒤적이며 요즘 소식을 찾던 그는 당신이 나오자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노아:아, 시아록. 슈테른 씨는 좀 어떠세요?
시아록:이오리 선생님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 다행이지. (당신을 보며 웃다가 잠시 빤히 쳐다봤다. 지금 슈슈랑 나이대가 비슷한가? 제 의사와 상관없이 가끔 이렇게 떠오르는 생각은 걷잡을 수 없지만, 그게 그를 착각하는 건 아니라 그저 고개만 가볍게 흔들고 털어냈다.)
노아:정말요? 잘됐네요, 꾸준히 좋아지고 계신 것 같으니... 정말 조금만 있으면 자리도 털고 일어나시겠죠.
시아록:아까는 그렇게 안 열리더니. (그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리다가 안의 진주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인어:하하, 레베카도 찾아줘서 정말 고맙대요!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운 손으로 조개를 살살 쓸어준다)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인간님을 만날 줄이야, 정말 반가워요!
시아록:으응, 그래. 그거 다행이네. (시선이 진주에서 떨어지질 못한다.)
인어:(당신이 계속 조개를 쳐다보는 걸 의문을 담아 지켜보다가) 아, 레베카의 진주는 정말 예쁘지 않나요?
시아록:응, 내가 본 진주 중에 제일 큰 거 같아.
인어:솜씨가 좋아서 금방금방 만든답니다. 제게도 몇 개 선물해 주었어요! (산호 장신구에 매달린 진주를 툭 건들이며)
친구를 돌려받아도 인어는 금세 돌아가지 않고 당신의 근처를 배회하며 구경합니다.
...뭔가 찾는 거라도 있는 걸까요?
시아록:(인어의 장신구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반짝이는 예쁜 물건엔 어쩔 수가 없다.)
왜 그래? 안 돌아가? 인간이랑 만나는 건 그렇게 좋은 게 아니야.
인어:아, 그, 그게...(우물쭈물해선 손으로 머리카락을 빙빙 꼬더니)
인간님, 혹시 저희 어디선가 만난 적 없나요?
시아록:어? 어... (마녀님과 같은 얼굴이긴 하지만, 정말 마녀일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잊어먹은 건지, 정말 자신을 모르는 건지. 결국 조금 두루뭉술하게 얘기해보기로 한다.) 나도 어디선가 인어님을 본 거 같은데.. 왜?
인어:아, 역시 착각이 아니었나 봐요! 사실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어쩐지 기시감이 들어서...
시아록:으응, 근데 뭔가 물어볼 거라도 있어? 아님 찾는 거나.
왜 안 가고 있냐는 말에 인어는 고개만 갸웃거립니다. 퍽 순진한 얼굴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마녀라기엔 다정하고 상냥한 성격이에요.
얼굴도 조금 더 앳되고, 눈동자도 반짝거리는걸요.
어쩌면 가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어는 전부 이렇게 생겼거나.
아무튼 인어는 마냥 즐거운 눈치로 말합니다.
인어:아, 또 다른 인간님과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무척 기뻐서요.
인어는 물장구를 치고는 묻지 않아도 재잘재잘 떠듭니다.
당신을 평범한 뭍의 인간으로 아는 모양입니다.
인어:어릴 적부터 뭍에 올라가 인간이 되고 싶었거든요. 두 다리로 걷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헤엄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겠죠?
시아록:으응. 많이 다르지.. (위화감 같은 게, 라고 작게 말하고는) 왜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당신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인어:전 어렸을 때부터 쭈욱 인간을 동경했거든요. 파도 너머 지상 세계란 어떤지도 궁금했고요! (마냥 신나서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이야기한다)
그런데, 얼마 전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꾼 일이 하나 있었죠.
여느 날처럼 얕은 바닷가에 나와있는데, 한 인간님이 바다에 빠져서 축 늘어져계신 거 아니겠어요!
제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셨을지, 아아, 상상도 하기 싫어요! 가엾은 인간님...
그래서, 그래서 그 분을 구해 편하게 앉혀드렸는데... 얼굴을 본 순간, 첫눈에 반해 버려서...
전 인어라서 인간님께 정체를 밝힐 순 없었어요. 그래도 제가 생각나시는 건지 가끔씩 바다로 나와계신답니다.
시아록:어, 그렇구나.
(얌전히 당신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인어:전 먼발치에서 그 분을 늘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붉어진 고개를 끄덕인다)
부러워요, 나도 인간이었다면... 그분 앞에 당당히 나타날 수 있었을 텐데.
시아록:으음, 그렇구나. (인어가 지상에 나오는 일이 좋은 걸까.) 뭐, 가끔 여기 나오는 건 좋지만, 인간 앞에 오늘처럼 섣부르게 나오지마. 큰일날 수도 있으니까.
(지금까지 지상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인간과 얼마나 다양한 인간들이 있는지 경험했다. 심해 마을과는 다르다. 인간은 누가 어떤 일을 할지 알 수 없다.)
인어:앗, 그렇지만... 꼭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 싶었는 걸요.
그리고 혹시나 위험해진다면,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면 못 쫓아올 거에요! 인간에게는 꼬리가 없으니까요. (희미한 달빛에도 찬란하게 반사하는 꼬리를 들어보인다)
그리고 마침 바다에 나오는 것 말고도 할 일이 생겼고요!
시아록:지상은 넓고, 바다도 넓어.. 언제 바다까지 돌아올거야? (순진한 인어를 보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할 일은 뭔데?
인어:(딱히 시키지 않아도 혼자 떠들 눈치지만, 물어봐 준다면 더욱 화색하며 입을 연다) 바닷 속에는 온갖 게 모여있는데, 그 중에서도 심해의 소용돌이 가운데에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가 산대요.
내내 망설였는데, 오늘 당신을 만나고 깨달았어요.
저는, 정말로 인간이 좋아요! 더는 미루지 않을래요!
인어는 당장이라도 마녀를 찾아갈 것처럼 들뜬 채,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시아록:... (다른 사람이구나. 그렇게 인간이 좋은가. 자신도 많은 사람을 만났고, 좋은 사람도 만나봤지만.. 잘 모르겠다. 자신은 슈슈만 괜찮다면 바다로 돌아가고 싶은데.) 음, 그렇구나. 만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마녀를 만나서 인간이 되면 날 찾아오던가. 며칠 뒤 올 건데 그때 되어서 여기로 오던가해. (바다의 사람이라면 역시 드넓은 고향의 사람이니 어쩐지 도와주어야 할 거 같다.)
인어:(두 눈이 순수하게 인간을 향한 호의로 반짝인다. 그 맹목적인 감정이 인간을 향한다니 조금 낯설지도 모르겠다) 간절한 마음은 소용돌이도 가를 수 있어요!
네, 제가 만약 인간이 된다면 당장 그 분을 쫓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겠지만, 그 전에 당신에게도 찾아올게요!
비행선의 완성까지 하루만을 남기고 있는 지금, 탑재된 브리니클의 추적기가 처음으로 작동됐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본거지를 찾아낸 것입니다. 위치는 총 세 군데로, 각각 해안 절벽의 동굴, 얼음 호수의 동굴, 설원의 동굴입니다. 그 중 도시와 가장 근접한 해안 절벽의 동굴은 대부분의 개체가 파괴된 것으로 확인, 오늘 밤 탐사를 개시합니다.
밤... 이라고는 해도 새벽 느즈막히 출발할 예정이라고 나와 있네요.
당신이 읽고 있는 걸 보던 대원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주네요.
대원: 내일 밤에라도 브리니클들이 도시에 밀려올지도 모르잖아? 마침 한 번 쓸어버려서 안전해졌고...
무리하는 감은 있지만, 그래도 이 기회를 틈타 본거지를 샅샅이 뒤지자는 거지.
그래서 오늘 작전에는 체력이나 성적이 좋은 사람만 갈 거야. 나머지는 혹시 모르니 도시 방위를 맡고!
시아록:그렇군요. 그럼 다들 어디로 갈지 정해진 건 아니네요. (상세한 설명에 보고서에서 눈을 떼고 상대를 바라봤다.)
대원: 행선지나 파견 나가는 대원들이야 벌써 다 정해졌지.
으이구, 당사자가 돼서는 어디로 가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으면 어떡해? 그러게 회의에 참가했었어야지.
시아록:바빴단 말이에요. 갑자기 회의해서 불러놓고..
(투덜거리며 보고서를 테이블에 내려뒀다.)
대원: 해안 절벽의 동굴로 간다더라. 그럼 수고해. (상큼하게 웃어주며 엄지를 척 든다)
시아록:고마워요.
(따라 엄지를 들었다.)
오늘 회의는 특히나 중요하다며, 되도록 모든 대원들의 참여를 장려했습니다.
그러니 마주치는 대원마다 잔소리를 늘어놓는 건... 그럴 만할지도요.
아무튼, 당신은 소탕 작전에 동원되는 대원 중 일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다소 피곤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브리니클과... 슈슈를 생각하면 오던 잠도 도망치듯 달아납니다.
그렇잖아요.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슈슈와 수중 인류를 치료할 방법이, 은신 중인 브리니클의 석판에 적혀 있다면.
대원: 자, 자! 여러분, 뛰지 마시고 질서를 지키세요~
오늘 특식은 닭죽입니다!
생각에 잠겨 있으면 저 너머에서 주방장의 목소리와,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당신을 쿡쿡 찔러 회의실에서 쫓아냅니다.
그래요, 뭘 하든 우선 잘 먹는 게 최우선입니다.
식사를 누리고, 오늘 있을 탐사에서도 힘을 내 볼까요?
물론 탐사를 원치 않는다면, 당신은 대원들을 배웅나가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시아록:(맛있는 냄새와 닭죽이란 소리에 회의실을 나가 식당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었다.)
(오늘은 오전부터 지금까지 쭉 바쁘기도 했고, 배가 상당히 고프다.)
행렬에 끼어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식당에 들어서면...
식기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나 이곳저곳에서 수다를 떠는 소리가 장안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레지스탕스에서 가장 생명력 넘치는 공간이라 호언장담할 수 있는 곳이죠.
모두가 편안하게 앞으로의 일에 대해 얘기하거나, 각자 안부를 묻거나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눕니다.
저 사람들이 도시의 방위를 최전선에서 지키고, 브리니클들의 본거지를 침략하러 간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시아록:(음식에 집중해 먹으며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맴돌았다. 지상에 올라와서 많은 것을 배웠다. 문명과 문화와 지식과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웠다. 그리고 더불어 전쟁의 끔찍함도 배웠다. 누군가가 죽어나가더라도 하나가 없어지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것. 살기위해서 한다고 해도 그렇다. 그러나 그 일상 속에서라도 이렇게 다들 웃을 수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다시 한 번 시끌벅적한 식당 내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 짓고 말았다. 그래서 한숨처럼 맛있다고 되뇌었다.)
브리니클과의 전쟁은, 인류와 브리니클 둘 중 한 명은 침몰해야만 끝이 나는 싸움입니다.
특히나 레지스탕스에는, 가진 사람보다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이 태반을 이루죠.
하지만 각자의 상처를 딛고, 서로에게 기대어 극복한 끝에...
모두가 힘든 현실에도 웃으며 버틸 수 있었고, 이렇게 전쟁의 끝을 보게 되는 순간까지 맞을 수 있던 거겠죠.
상처를 덕지덕지 달고도 즐겁게 웃는 사람들을 보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의 행복한 미래를 바라보는 그들을 보면...
당신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이 곳 역시, 어느샌가 당신의 또 다른 고향이 되었으니까요.
입가에 묻은 마늘빵 부스러기를 털고 우유로 목을 축이면,
배가 통통해지는 게 느껴져요. 마음도 같이 채워진 듯 흡족합니다.
이 완벽한 식사에서, 하나 신경쓰이는 게 있다면...
옆에 늘(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자주) 붙어 다니던 노아가 없다는 것 뿐이겠죠.
그러고보면 진주를 팔고 오겠다더니... 늦네요.
별 수 없죠. 그도 요즘 비행선을 정비하느라 바쁘다고는 했으니...
이따 새벽에 출정할 때까지 혼자서나마 시간을 보내야겠습니다.
시아록:많이 바쁜가. 밥 챙겨먹어야 하지 않나.. (식판을 갖다 놓으면서 걱정되지만, 노아도 이제 성인이고 간섭하면 싫으려나. 생각하다가 가기 전에 슈슈 만나고 가야지, 나가기 전의 당연한 루틴처럼 자연스레 발걸음이 슈슈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챙겨가야 할 게 있으면 나중에 물어보지, 뭐. )
레지스탕스 기지 밖으로 나가면, 밖은 벌써 깜깜나라입니다.
저 멀리 아스라한 네온사인 불빛이 물감을 떨어트린 듯 선명하게 빛을 내고,
머리 위로는 유독 크고, 유독 선명한 보름달이 구름을 타고 흘러갑니다.
곳곳에 있는 가로등만이 발 밑을 구분하게 해 주는 밤.
어둠의 장막을 파헤치며, 노아가 알려준 지름길로 곧장 병원으로 향하면...
병원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당신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오리가 진작 열쇠를 내놓았거든요.
불이 온통 꺼진 병원에는 적막이 내려앉아 있어서...
꼭 브리니클에게 삼켜진다면 이럴까 싶기도 할 정도로 어둡습니다.
시아록:(옛날 같았으면 이런 적막이나 밤은 무서웠을 텐데. 이미 익숙해져버려서 이런 건 생각보다도 무섭지도 않은 자신이 새삼스럽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슈슈가 있는 방으로 향한다.)
병원에 아무도 없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밤 늦게까지도 응급 환자가 들어오던 병원이 이토록 조용하다는 건,
이제 브리니클의 습격으로 위험해지는 사람이 극히 적어졌다는 뜻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이제 지상 세계에서 조심해서 다닐 필요도 없겠어요.
처음 올라왔을 때는 특히나 한 번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하고 다녔는데...
이제 노아와 가끔 그랬던 것처럼, 슈슈와도 편안한 마음으로 지상 세계를 누빌 수 있겠네요.
그런 순간은 분명, 해롭지 않은 단맛으로 가득차 있을 거에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복도의 불을 켜고, 슈슈가 있는 방으로 들어서면.
여전히 들판처럼 완만한 바이털 사인을 그으며 잠들어 있는 슈슈가 있습니다.
떨어진 지 몇 시간쯤 되었을까 싶은데, 이렇게 보니 또 그립고 반갑네요.
시아록:안녕, 슈슈. 오늘은 어땠어? (네가 잠든 캡슐 앞에 코가 닿을 듯 가까이 다가가 작게 말을 걸었다.) 난 아까 너 만나고 진주 주으러 갔었어.
(주변을 두리번 쳐다보고 유리에 이마가 닿은 채로 더욱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우리가 바다에서 쓰던 산호빗도, 돌 칼도 주웠고, 또.. 인어도 봤어. 여기 올라와서 진짜 다 오랜만에 보는 거 있지.) 너도 얼른 깨서......, 같이 보면 좋겠다. 그치?
나 조금 있다가 브리니클 본거지에 갈 거야. 그게 없을 수록 네가 건강해진다니까, 좀 더 힘내서 하고 돌아올게. (홀로 조용히 유리 위를 손으로 더듬다가 이내 작게 미소지었다. 그게 아스라하게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그리고 너를 보며 잠시 서성이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럼 금방 다녀올게! (인사는 늘 활기차게 해야하는 것이다. 병실을 나서 기숙사로 돌아가 필요한 물건을 챙기기로 한다.)
시아록:(너무 피곤하긴 하지만, 궁금한 걸 참을 수 없는 건 여전해서 피곤한 다리를 질질 끌고 대장에게 다가갔다.) 대장, 뭐해요? 나도 할 일 같은 게 있어요?
유진:...그 쪽 억지도 적당히 받아주는 게... 아, 오셨습니까.
시아록:(억지? 언뜻 들은 단어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얌전히 유진을 쳐다보았다.)
유진:(안전지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지 불편한 표정을 펴고 맞아준다. 그를 제법 오래 본 당신이라면 그게 유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환대라는 걸 알 것이다)
안전지대 쪽 투자자들과 씨름하던 중이었습니다.
안전지대 바깥이 살 만 해졌다면, 이제 돈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은 좀 내보내도 괜찮지 않냐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 오고 있어서...
시아록:하? (가만 듣고 있다가 벌컥 화가 났다.) 당연히 말도 안 되죠. 브리니클이 다 치워진 것도 아니고, 밖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지도 모르는데 지금 사람들을 내보내자고요? 제정신이래요? (브리니클 한 번 제대로 해치워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감히 어떻게 거기에 대고 왈가왈부 할 수 있나.)
유진:우리 쪽에서는 당연히 끝의 끝까지 거절할 거지만...
아마 안전지대 안쪽 구역을 자기들끼리 독차지하고, 마음껏 부를 축적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피곤한 낯으로 팔에 낀 주머니를 풀고는) 바로 오늘 새벽에 있을 작전에 대해서는 들으셨습니까?
시아록:..말도 안 되는 말이네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들만 배부르는 게 무슨 좋은 일이란 말인가.) 대장이 고생 많네요. 진주 즙느라 회의에 늦어서.. 그래도 해안 절벽으로 제가 가는 건 알고 있어요. 뭔가 더 자세히 알아야 할 게 있으면...
유진:저는 이 도시가 더 안전해진다면 만족합니다. 허나... 투자자들 또한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으니, 대응책을 찾아야 할 시점일 테죠.
브리니클과의 전쟁이 끝나면 장벽을 무너트리는 방안도 준비 중입니다. 신정부 쪽에서는 오히려 환영하는 눈치더군요.
시아록:브리니클만 없다면 그것도 좋을 거 같아요. 땅은 넓으니까요.
유진:그러고 보니 노아는? (얘기를 들으며 등에 두른 무기를 내려놓는다)
알고 계시면 됐습니다. 충분히 쉬어 두십시오. 당신이라면 잘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아록:전 회의있다고 해서 달려왔고, 노아는 진주를 팔러 간다고 했는데... 그러고보니 저녁 식사 시간때도 못 봤네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노아를 찾아볼까요?
유진:괜찮습니다. 특별히 바쁜 일이 생긴 것일 수도 있으니. 노아가 돌아온다면 당신에게도 인사해놓으라고 얘기해두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볼일이 생겼는지 무기고 쪽으로 들어간다. 뒤에도 몇몇 고위 대원들이 따라 들어가는 게 보인다)
출전 전에 마지막으로 무기들을 정비하려는 듯합니다.
대장이 분주한 모습을 보면, 확실히 우리가 큰일을 하려고 한다는 게 실감이 나네요.
시아록:(떠나는 그들을 보다가 기숙사로 발을 돌렸다. 조금이라도 자고 나가는 게 컨디션에 좋겠지.)
그건 분명 과감한 시도겠지만, 성공한다면 분명 인류에게 위대한 도약을 쥐여줄 겁니다.
당신은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침대로 꾸물꾸물 들어갑니다.
아쉽게도 전기장판 같은 건 아직 없지만, 핫팩이나 온찜질용 수건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두꺼운 이불과 베개도요. 호화롭고 푹신한 침대는 없다지만,
당신에게는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처럼 느껴집니다.
늘 침대에 누우면서도, 쉴 수 없었던 나날이었으니까요.
온풍기를 틀어두느라 문은 열고 잡니다. 틈새로 환한 빛이 들어와, 벽을 타고 천장에까지 닿습니다.
천장에 낀 얼룩무늬가, 어쩐지 달을 떠오르게 합니다.
아, 그러고 보면 지금 잠들었다간 또 그 꿈을 꿀까요?
하지만 잠을 마다하기엔 당신은 너무 지쳤습니다.
이만 쏟아지는 수마를 받아들이고 몸을 맡기기로 해요.
...
...
―
얼마나 눈을 붙였을까요? 찌푸둥한 몸을 깨우며 일어나면 벌써 새벽 공기가 문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옵니다.
바깥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간간히 코 고는 소리가 복도에 울립니다.
동시에 아득한 저 너머에선 대원들끼리 의논하고, 무기를 챙겨드는 모습이 보이고요.
드디어 출전할 시간인 겁니다!
각자 무기와 짐을 챙긴 8명의 선발 대원들은 도시를 빠져나가,
절벽에 있는 브리니클의 본거지로 향합니다.
떨리기도, 두렵기도 하지만 레지스탕스 일원들의 표정에서 공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다시 한걸음, 승리에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까.
해안 절벽까지는 차를 타고 이동합니다.
작은 차에 구겨넣어지고 몸집을 불린 우리들을 보면,
꼭 작고 약한 심해어들이 뭉쳐서 거대한 형상을 만들던 게 생각납니다.
우리는 작지도 약하지도 않지만요!
절벽에 가까워질수록 기온이 낮아집니다.
따로 챙겨온 겉옷을 걸치며 창 밖을 살피면, 벌써 해안 절벽이 부쩍 가까워져 있습니다.
저 너머로 동굴의 입구가 보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숨기고 있는 듯 하고,
또 먹이를 찾아 입을 벌리는 고래같기도 합니다.
동굴의 입구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우리는 가슴의 떨림도, 바람도 거스르며 그 안으로 발을 들입니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얼음동굴처럼 뼛속까지 시린 추위가 찾아오겠죠.
동굴 안에서는 끝없이 소리가 울리고, 어두워서 서로를 잘 보지 못하게 됩니다.
대원: 전원, 대열을 정비한다! 안쪽으로 진입 준비!
무기부터 손에 들고 고개 숙여서 안으로 돌격!
하지만 몇 번이고 발을 맞춰 위험을 파헤친 우리잖아요. 뭉치기만 하면 무서울 건 없습니다.
모두 수고했다. 이것으로 분명 유의미한 조사가 됐으니 편히 쉬도록. 이변이 있다면 꼭 나나 부대장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시아록:아.. (앞에 나서는 건 좋아하지 않는데, 한숨을 집어 삼켰다. 말해야 되나? 저게 진짜 알이고, 브리니클이 태어나는 거면...)
대장, 나 할 얘기있는데. 해도 될까..?
대장의 지시에 대원들은 저마다 안심한 눈치로, 또는 불안한 눈치로 차에 올라탑니다.
발을 떼지 못하는 당신을 유진이 들여다봅니다.
유진:무슨 일이 있나? (별 저항 없이 한 쪽 무릎을 숙인다)
시아록:응, 별일 아닐지도 모르는데, 저기.. 툭 튀어나온 지형 보여? 금 간 알 같아. (요즘 꿈을 계속 그런 걸 꿔서 신경 쓰이는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일 없으면 좋겠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늦으니까. 만약 괜찮다면 조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지 않아요? 뭐, 결정은 대장한테 맡길게요.
유진:금이 간 알? (일어서서 무너진 곳을 살핀다)
확실히 그렇게도 보일 순 있지만... 안에 움직이는 브리니클은 없었으니 괜찮을 겁니다.
시아록:그렇지. 그냥 괜히 신경쓰여서 얘기해 봤어요. 아무일 없다고 판단한다면 괜찮아.
유진:어째서 갑자기 붕괴해버렸는지는 따로 조사대를 꾸릴 예정이었지만, 신경쓰인다면 잠시 정황을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아록:그럼 그냥.. 붕괴 원인 조사 때 같이 조금 조사하는 것정도로 난 좋은데..! 대장이 내리는 판단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유진:이 주변은 원래 지반이 약하고 거기다 몇천 년을 파도와 맞닿아 있었으니, 자연적으로 붕괴한 것에 더 가까울 거다.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얼마 후에 다시 뵙지. (차에서 등을 돌리고 동굴 쪽을 더 살펴보러 간다)
시아록:네. (얌전히 대답하고, 동굴쪽으로 향하는 그를 등 뒤로 두고 차에 올라탔다.)
차에 올라타 무너진 동굴 쪽을 다시 보면...
지금 와서 보니 그냥 평범하게 무너진 동굴일 뿐입니다.
대장이 말한 것도 그렇고... 확실히 꿈이 너무 불길한 탓에, 잠시 착각한 걸까요.
당신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차는 우리를 태우고 멀어집니다.
본부에 도착하면, 이번 임무를 마친 대원들은 모두 피곤함을 호소하며 각자의 침실로 돌아갑니다.
갑자기 무너져서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거지에 브리니클이 하나도 없다니 정말 안전해졌다며 기뻐하는 사람도 있네요.
당신은 그들을 뒤로하고 다시 침대와 포옹하며 잠을 청합니다.
여전히 이부자리는 조금 서늘하고, 노아의 몫인 옆 침대는 비어 있습니다.
창백하게 뜬 보름달만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당신은 눈을 뜹니다.
가물가물한 시야를 비집고 햇빛이 쏟아집니다.
몸을 일으켜보면 아침을 맞아 밝아진 당신의 기숙사가 눈에 띄어요.
오랜만에 푹 잤는지 몸도 개운합니다.
오늘은 그 꿈을 꾸지 않은 것 같아요.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다행입니다. 이만 일어날까요?
아니면 모처럼의 낮잠을 만끽해도 좋습니다. 얼음 호수의 동굴로 출발하는 건 늦은 오후니까요.
시아록:(햇빛이 쏟아지는 창문을 잠이 덜 깬 눈으로 쳐다봤다가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그 꿈을 꾸지 않아서인가 훨씬 기분도 몸상태도 좋다. 그래도 어제의 피곤함은 진득하게 들러붙어서 아직 반쯤 감긴 눈으로 천천히 양치를 하고, 느지막히 세수를 하고, 느릿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늦은 오후에나 떠날 거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중요한 게 있다. 슈슈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 가야지. 머리도 대충 쓸어묶고는 방을 나섰다.)
자다 일어나 부숭부숭해진 머리를 쓸고, 여전히 당신이 독차지 중인 2인실을 나서려 하면...
문을 벌컥 열자 바로 앞에 인영이 보입니다.
노아:시아록?
반가운 얼굴입니다. 노아는 당신이 갑자기 나와서 놀랐는지 움찔거렸다가,
이내 표정을 가라앉히고 가방을 고쳐맵니다.
시아록:어, 노아? 안녕. 잘 잤어?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냈다.)
노아:...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직도 숙소에 계실 줄은 몰랐어요.
밖에서 점심 배식 중이에요. 이제 막 시작했으니까... 서두르셔야 따뜻한 음식을 드실 수 있을 걸요.
시아록:어, 벌써 점심이야? (아침인 줄 알았는데, 역시 피곤했나. 뒷목을 주무렀다.) 노아는 점심 먹었어?
노아:그럼요, 해가 중천인데요... ...어제 새벽까지, 작전에 나갔다 오셨다고 들었어요. 몸은... 괜찮으신 거죠.
전... 바쁜 일이 있어서. (숙소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가방만 풀고 고글만을 목에 매단 후 방 문턱에 발을 댄다)
시아록:응, 난 괜찮은데. (대답하다말고 급하게 떠나는 당신을 붙잡았다.)
그렇게 바빠?
노아를 좀 더 들여다보면 얼굴이 온통 퀭하고 푸석푸석합니다.
대체 새벽 내내 어디서 뭘 하다 온 걸까요?
노아:(가만히 당신의 대답을 듣고 있다가, 팔을 붙잡히면 얼굴을 살짝 찡그린다.)
...네, 바빠요. 비행선 시범 운행 중이라서요.
시아록:어제도 그래서 저녁에 없었어? 조금 쉬엄쉬엄해도 되지 않아? 너 얼굴에 피곤함이 덕지덕지야..
노아:...어제 제가 하던 말을 똑같이 하시네요.
그 때 뭐라고 하셨었죠? 다른 사람들도 바쁜 건 매한가지고, 무엇보다... 아직은 무리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던가요.
저도 같아요. (한 쪽 벽에 기대고는 눈가를 꾹꾹 누른다)
시아록:나랑은 다르지. 넌 기계 만지는데, 그런 건 정확도가 생명 아냐? 나야 그런 거 잘 못하니까 모르지만.. 그리고 넌 많이 컸지만, 여전히 어리고..
(이런 세계라도, 제 바닷속이 그러했듯 이곳에서도 그러했듯 연장자가 어린 사람을 지키는 건 당연하다.) 넌 좀 쉬어. 점심도 먹었어?
노아:(몸을 챙기라는 말에도 고집스럽게 고개만 젓는다.) 적어도 비행선 운행에 문제가 될 정도로 혹사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됐어요.
...오늘 비행선을 띄우기 전에 최종 점검에 들어가요.
시아록:그래도 점심 먹고 가. (여즉 잡고 있던 데 팔을 끌었다.)
노아:궁금하시면 구경 오셔도 된다고... 오필리아 씨가 그러셨어요.
전 됐어요. 이따... 뵈어요. (단호하게 팔을 내치고 방 밖으로 나가버린다)
챙겨주는 사람이 무안하게, 노아는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시아록:(노아가 멀어지는 걸 빤히 보다가 뒷목을 매만졌다. 어제부터 피하고 있는 거 같은데... 작은 한숨을 참았다.)
비행선을 살피러 가는 거겠죠. 도와주는 사람이야 많다지만 노아는 거의 유일한 비공정사이기는 하니까요.
예전에는 당신이 거절해도 아랑곳 않고 어울려오곤 했는데,
저 쪽에서 먼저 피하는 모습이 생소합니다.
당신이 고심하거나 말거나 시간은 흘러가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점 작아집니다.
이런, 가만히 서 있다간 슈슈의 병문안은 고사하고 점심밥도 못 얻어먹겠어요.
시아록:어쩔 수 없지.. (점심을 얼른 먹고, 슈슈에게 가기로 마음먹고 발을 움직였다.)
당신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식당으로 향합니다.
오늘 메뉴도 역시 조금은 특별해요.
이번에는 식판이 온통 버섯으로 도배가 되어 있거든요!
버섯 돼지갈비 구이, 버섯볶음, 양송이 스프, 버섯 카레까지...
폭탄이라도 맞은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전에 피엘 씨가 버섯 인공 재배에 성공했다고 했던가요.
양식을 무사히 마치면 레지스탕스에 가장 먼저 보급해주겠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많이 내놓을 줄은 몰랐죠.
하지만 어제와는 다르게 어쩐지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몸은 분명 식당에 앉혔지만 당신의 정신은 외따른 곳에 가 있으니까요.
형식적으로 음식을 씹는 과정을 마치면, 당신은 다시금 이오리네 병원으로 향합니다.
다시 찾은 병원은 여전히 한가합니다.
아직 몰려올 시간대는 아닌가 보죠. 점심시간이기도 하고요.
이오리는 자리를 비워 자세한 건강상태를 들을 순 없지만,
그래도 슈슈가 있는 방은 잘 열려있어요.
병실은 평화롭습니다. 바깥의 분주한 사람들과는 멀어진 공간이라서인지
세상의 한구석을 뚝, 떼어놓은 듯 공기가 침체되어 있어요.
오늘은 조금 늦은 아침 인사를 건넵시다. 그리고,
당신이 줄 수 있는 희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합시다.
시아록:안녕, 슈슈. 난 오늘 되게 늦잠 잤어. 어제 일이 많아서 피곤했나봐. (어제 내가 생각보다 놀랐는지도 모르지만. 동굴이 무너져내렸던 걸 떠올렸지만, 입밖으로 꺼내진 않는다. 굳이 너를 걱정시킬 필요는 없다.) 그래도 꿈도 안 꾸고, 진짜 푹 잤어.
그리고 점심 먹고 오는 길인데.. 진짜 그 말로만 듣던 버섯 재배에 성공했는지, 온갖 게 버섯요리더라. 맛있긴 했지만. (네게 웃으며 얘기했다.) 오늘 오후에는 또 다른 브리니클 본거지에 갈 거야. 어제 간 곳은 깔끔하게 처리되었는데, (아마도, 라는 말을 목으로 넘겼다.) 그걸로 오늘의 너는 한층 더 건강해졌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네가 깨어날 날이 머지 않았겠지?
(잠시 너를 빤히 쳐다보다가 작게 깊은 숨을 내뱉었다.) 네가 깨어나기 전까지 좋은 꿈만 꾸고 있으면 좋겠어. (인사하기 위해 유리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 가서 짐도 챙기고 해야겠어. 그럼 또 다녀올게.
당신이 내뱉는 진심은 늘 비슷했어요.
좋은 아침이야, 보고 싶었어.
아픈 곳은 없지. 내 하루는 이랬어. 내가 보던 풍경을 너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애정의 언어는 반복되고, 그리움과 기대를 담은 인사는 어제와 드문드문 겹칩니다.
아니, 어제뿐만이 아니라 그저께, 혹은 1년, 아니 4년 전 처음으로 잠든 슈슈와 함께 아침을 맞았을 때부터...
당신의 언어는 반복되었을지도 몰라요.
그것은 희망의 표시입니다. 말은 되풀이되고, 잊혀지지 않은 마음은 올곧게 겹쳐지며,
간절한 바람을 애정으로, 신념으로 자라게 합니다.
그 사랑은 슈슈를 숨쉬게 하는 동시에,
어느새 당신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4년 전의 당신과 달라지지 않은 마음을 계속해서 노래하세요.
훗날 그것을 들은 슈슈가 안심할 수 있도록.
슈슈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한동안 마음의 궤적을 덧그리며 닿지 않는 손으로 얼굴을 몇 번 매만지고 나면,
병원이 조금 소란스러워집니다. 손님이 온 모양이에요.
슈슈의 안색이 어제보다는 편안해 보이는 걸 위안 삼아, 오늘 하루를 시작합시다.
...
다시 레지스탕스 기지로 돌아오면, 시곗바늘은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집합 시각은 오후 3시 30분. 얼마간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장내는 한산하지만 각자의 일로 바빠 보입니다. 곧 있을 출전에 대비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또 대장, 유진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어제의 동굴 조사가 끝난 모양이에요.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까요?
시아록:아, 대장 돌아왔구나. 어제 일 물어보러 가볼까.
대장의 소재지를 물어보면... 아직 회의 중이라는 것 같습니다.
대신 동행하던 대원들이 들고 온 보고서는 빌려볼 수 있다고 하네요.
시아록:회의, 어쩔 수 없네. 나도 보고서 주세요. (다녀온 사람들에게 부탁한다.)
어제 같은 작전을 수행해서인지 친숙한 얼굴들이 웃는 낯으로 보고서를 건넵니다.
읽어보면 어제 동굴이 붕괴된 것은 사고이며,
원인은 지진과 파도로 인한 주변 지반의 약화 때문이라고 합니다.
외부에서 갑작스럽게 충격을 받은 흔적도 있다고 한 걸로 보아,
브리니클 한 마리 정도는 근처에 있었을 거라는 분석도 있네요.
하지만 그게 동굴을 무너트리거나 사람들을 위협할 만큼의 힘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결국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였다는 뜻이죠.
별 일이 아니라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시아록:다행이네요. 이게 끝인 거죠? (보고서를 한 번 더 훑어보고 그들에게 건냈다.)
아, 당신이 미처 채집하지 못한 사료들은 일부나마 복구에 성공해, 현재 해석 중이라는 소식도 있습니다.
어제의 일에 얕은 미련도 갖고 있었는데... 다행이네요.
대원들은 그게 전부이며, 다치지 않은 게 기특하다며 등을 두드려줍니다.
이래뵈도 근육질로 덮인 팔이라, 손이 퍽 매서워요!
그 밖의 다른 특이사항은 없어 보입니다. 성공적인 수확 덕에 분위기도 좋고요.
일부는 정말로 인류가 브리니클과의 전쟁에서 이길 거라는 희망적인 추측을 내놓습니다.
시아록:으, 아파요.. ( 괜히 호들갑스럽게 두드려진 등을 매만지려고 노력하며 그들의 희망적인 추측이 어딘가 안도섞인 미소를 지었다.)
놀라울 만큼... 할 일이 없네요.
보관실에 들려보려고 해도, 지금은 한창 장비 점검 중이라 무기고에 들어가면 방해가 될 겁니다.
별로 할 일 없이 시간을 때우고 있으면, 문득 노아의 말이 생각납니다.
비행선 제작 담당인 오필리아 씨가, 한 번 구경와도 괜찮다고 했던가?
시아록:할 게 없네. 아까 비행선보러 와도 된다고 했으니까 갈까..
어떻게 할까요? 당신은 자유의 몸입니다.
시아록:(비행선을 보러 가기로 한다. 슈슈와 함께 바다로 돌아가면 그런 건 못 보겠지. 그리고 나중에 내가 알고 있으면 슈슈랑 같이 보면서 설명하기 쉬우니까..)
훗날을 위하여, 그리고 스스로의 호기심을 위하여.
당신은 비행선을 보러 가기로 합니다.
아틀란티카, 완성!
본부 뒤편의 공터로 나오면,
지금까지는 천막에 둘러싸여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았던...
거대한 풍선에 둥둥 매달린 배를 발견합니다.
레지스탕스의 최종병기, 비행선이죠.
그것은 화려하고 섬세한 금색의 톱니와,
구름만큼 새하얀 비행 장치와 날개,
그리고 철갑을 두른 듯 늠름하고 단단한 몸체를 자랑합니다.
당신보다 훨씬 앞서서 와서는, 그 위세를 먼저 올려다보는 인영이 있습니다.
익숙한 뒷모습이죠.
시아록:(뭔가 이래저래 말은 들었지만, 거의 제대로 완성된 비행선은 신기하기 그지없어서 멍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말로만 듣던 것인데, 이렇게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니 신기합니다.
정말 이 거대한 게, 사람도 태우고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걸까요?
당신이 반쯤 멍하게 비행선을 구경하고 있으면,
누군가 아는 체를 해 옵니다.
오필리아: 어어? 이게 누구야~?
시아록:아, 오필리아. 구경하러 와도 된다고 해서..
오필리아: 시아록이 아니야, 어제 탐사는 잘 하고 온 거야?
이제 정말 완성이지! 내 평생의 역작이 될 거야!
이 녀석 좀 봐, 거대하고 또 근사하지 않니?
시아록:어제는 잘 다녀왔어요.
진짜 멋지네요. 이런건 생각도 못 했는데!
(호기심과 신기함에 눈이 반짝반짝하다.)
오필리아: 이 녀석의 등에 올라타, 도시를 내려다보는 걸 상상해봐.
바다처럼 푸른 바람을 맞으며 쏜살같이 지나가는 광경을 떠나보내겠지!
아~~ 누가 뭐래도 갑판은 내 차지야!
시아록:나도 같이 갑판에 올라가게 해줘요. (웃으면서 얘기한다.)
그래도 나는 거 빼곤 바다는 못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 삐죽, 주머니애서 튀어나온 송곳처럼 바다에 대한 자부심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말해버렸다.)
오필리아는 자신의 작품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습니다. 진심을 다해 벅차는 마음을 내뱉는 그의 두 눈은 빛나고 있습니다.
오필리아: 하하, 너 하는 거 봐서 생각해보지 뭐! (어깨에 턱, 팔을 걸어온다)
아~ 누가 뭐래니. 하지만 하늘만큼 근사한 곳도 없단다, 얘야.
시아록:하늘도 근사하긴 하죠. 근데 언제 날아요?
오필리아: 바닷속에 이렇게 큰 배는 못 보내잖아. 하지만 하늘에는 얼마든지 이런 멋진 배를 띄울 수 있지!
거기다 물 대신 공기를 가르며 날 수도 있고 말이야!
시범 운행은 이미 마쳤으니, 너희들이 올라타면 안전 장치까지 풀고 정식 운행을 시작할 거야.
마침 딱 좋을 때에 왔네. 아마 이만큼 여유롭게 비행선을 구경하는 건 이제 마지막이겠지? 온 김에 실컷 봐 둬.
시아록:(당신의 즐거움 가득한 자부심 섞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이제 뜨기 시작하면 이 비행선의 전부를 구석구석 자세히 볼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직은 전체적으로 눈에 담고 싶어서 그 자리에 서서 비행선을 빤히 보다가 가까이 가기 전 물었다.)
비행선 만드느라 많이 바빴죠? 노아가 엄청 바쁘다고, 아까 점심도 안 먹고 가던데요.
오필리아: 아아, 맞아. 온 김에 노아 녀석 좀 데리고 가라. 어제 새벽부터 와서는 괜찮다는대도 죽치고 일만 했다니까?
우리가 일을 너무 많이 시켜서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었어, 진짜로.
바쁘기야 바빴지. 그래도 이제 준비는 다 끝났으니까! 다른 대원들한테도 구경 와도 된다고 좀 전해줘.
근데... 정말 귀신같네. 아직 구경 오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아채고 이렇게 왔대? (기분이 나쁜 건 아닌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시아록:역시.. (노아를 떠올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자기 이름이 언급되자 비행선만 꿋꿋하게 올려다보던 노아가 고개를 돌립니다.
노아:...
시아록:노아가 아까 말해줬어요. 오필리아가 보러 와도 된다고 했다길래.
이 쪽을 쳐다보다가, 얼른 다시 모른 척을 하네요.
시아록:(그대로 시선을 맞추듯 노아를 쳐다봤지만, 도망가버린 걸 보고 움찔, 미간이 찌푸려졌다.)
노아.
오필리아는 바빠서 누구한테 구경 오라고 전할 시간조차 없었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노아는 분명...
노아는 뭔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마냥 눈에 띄게 움찔하더니,
노아:...무슨 일이에요?
여전히 몸은 돌아보지 않은 채로 이 쪽을 흘겨봅니다.
시아록:(그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오필리아에게 물었다.) 오필리아, 노아 빌려도 돼요? 비행선 설명도 노아한테 듣고 싶은데.
오필리아:흐응... 노아야 당장 할 일도 없고 한가하니까, 데려가주면 오히려 고맙지!
자, 자. 쑥스러워하지 말고. (노아의 손에 들려있던 걸레를 얼른 뺏어들고) 빨리 갔다 와.
노아:(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댔다가 상대방이 너무 막무가내라 포기한다...)
...아, 음.
여...긴 무슨 일로 오, 셨어요? (높낮이 없고 빠른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하며)
시아록:나 비행선 구경하고 싶은데 안내해줘. (이유없이 피하는 건 역시 기분 좋지 않다. 결국 한층 목소리가 낮아지고 말았지만, 위협적이진 않다.)
그리고, 노아가 초대한 거잖아. 사실. ( 작게 속닥이며 그를 쳐다봤다.)
노아:(비행선을 구경시켜달라는 말에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당신을 돌아본다)
(그 사실을 다시금 짚어주면 고개를 팍 숙이곤 갑자기 몇 걸음 성큼성큼 앞장선다) ...아, 아직 내부는 단장 중이라 못 보여드려요.
오, 오늘 치 식사도 요리하는 중이고, 비상 식량이나 구호 물품도... ...
시아록:응. (너를 따라가며 네 말에 귀기울인다.)
노아:...아무튼, 이 비행선은 총 3층으로 나뉘는데,
맨 밑의 지하 1층은 창고, 1층은 로비와 식당, 2층은 숙소...
그리고 3층 옥상은 갑판과 조종석이 있어요.
오늘 오후에 바로 출항한다고 했죠? 얼음 호수의 동굴로 향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시아록:응, 맞아. 그렇게 하기로 했지. (역시 나중엔 둘러볼 시간은 없으니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행선 움직이는데 노아도 같이 가?
노아:이 비공정은 단순한 배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대포같은 무기도 갖추고 있어요.
그래서... 정착하지 않아도 브리니클의 본거지를 바로 공격할 수 있을 거라고 해요.
비행선 덕분에, 이 전쟁도 정말 끝이 날지도 몰라요. (비행선 표면을 손으로 살살 쓸어내린다)
전 오늘 주조종사 역할이에요. 빠질 수야 없죠.
노아는 의외로 자부심있게 줄줄 설명을 잇습니다.
아니,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서 지금까지 왜 그렇게 피해다닌 거람?
노아:전쟁이 끝나면, 이 세상도 정말 안전해지겠죠? 하루하루 다칠 걱정 없이 생활을 꾸려나갈 수도 있을 거고.
비행선을 타고 이번엔 출정이 아니라 여행을 해 볼 수도 있겠죠. (몸체에 어깨를 기댄다)
시아록:(가만히 당신의 이야기를 듣다가 시선을 맞췄다.) 그러게, 나중엔 여행용이 되면 좋겠어. 전쟁은 없는 게 맞으니까.
그런데, 노아. 나 하나 물어도 돼?
노아:(이 쪽을 힐끔 쳐다보다가 눈을 돌린다.) ...시아록은 이 전쟁이 끝나면, 레지스탕스 그만둘 거에요?
...아니에요. 대답하지 말아주세요. 알 것 같으니까. (두 눈을 꽉 감고 고개를 젓는다)
시아록:뭐야, 노아가 되묻는 거야?
음, 뭘 알 거 같은데?
노아:돌아갈 곳이 있잖아요?
(고개를 저어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고) ...물어볼 건 뭔데요?
시아록:그렇지, 돌아갈 장소가 있긴 하지. (잠시 마을을 떠올렸다가 저도 모르게 눈가가 찌푸려졌다. 다들 괜찮겠지. 입밖으로 그 일을 꺼내는 건 무서워서 그냥 입을 다물고 털어냈다.)
응, 뭐.. 대답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오늘 계속 피하고 있지? 시선도 맞추면 곧장 피해버리잖아. 나 뭐 잘못했을까?
노아:(팔을 모으며 고개를 숙인다.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고 있다가)
떠나실 때, ...짐은 두고 가실 거잖아요.
그럼 필요없는 것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만 던져주세요. ...뭐든.
시아록:... (당신 앞에 쪼그려 앉아서 너를 올려다 보았다. 한참을 도망쳐다니던 당신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왜 내가 다 두고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욕심 많아서 다 갖고 갈 거야. 하지만, 노아가 원하는 게 있다면 주고 갈게.
그래도 있잖아. 여긴 내 두번째 고향이라 다시 놀러올 수도 있다고.
노아:(그 말에 한 번 억눌린 숨을 터트리듯 내쉬고는) 하나 정도는 남기고 갈 수도 있잖아요?
계속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했잖아요. 거기로 돌아가면 이제 지상 인류가 아니게 될 텐데 어떻게 돌아온다는 거에요...
...슈테른 씨가 깨어나는 것도 이제 금방이니까... 기분이 어떠세요?
시아록:글쎄, 내 성격에 하나도 안 두고 갈 거 같은데. (바닷속 집에 버리지 못하고 늘 이리저리 쌓여있던 물건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원하는 거 꼭 얘기해.
내가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한다고 해도 그때 인어씨처럼 만나면 되는 건데, 왜 날 못 오게 하려는 거야? (장난섞어 웃으며 손에 턱을 괴었다.)
......., 다들 사실 말이 많잖아. 깨어나도 시간이 너무 달라져있고, 관계의 변화도 심할 거고 어쩌고 저쩌고.. 그래도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냥 기뻐. 다른 감정 아무것도 없이. 그냥, 기뻐.
시아록:(그 꿈이 너무 생생한 나머지, 이제는 뭐가 제대로 현실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면서도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가능한 추측들이 두서없이 떠올랐으나, 쉽사리 인정하기도, 쉽지 않아서 머릿속은 하나씩 배제하고 있었다.)
여태껏 비행선을 관리하던 제가 하는 말이잖아요. 좀 믿어주세요.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곤 식당을 떠난다)
시아록:응.. (결국 식당을 떠나는 당신의 등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당신은 점토처럼 느껴지는 아침 식사를 삼키고, 마지막으로 녹차도 떠 마십니다.
오늘 아침에 쓴 메뉴라고는 없었는데, 왜 이렇게 입이 씁쓸한 걸까요.
냅킨으로 입을 닦고 다시 밖으로 나오면,
여전히 아침부터 활기가 넘치는 레지스탕스 사람들이 보입니다.
...당신은 막무가내로라도 보관실에 가서 석판을 뒤져볼 수 있습니다.
혹시나 석판에, 이 사태에 대해 뭐라도 적혀 있다면.
그런 희망에 매달려서 말이에요.
시아록:(아마도 비행선으로 브리니클을 전부 토벌할 생각에 신이 난 듯한 사람들을 보면서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그저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 이를 악물고, 그 활기에서 벗어났다. 멍청하게 함께 들뜨지 말고, 바꿀 방법을 얼른 찾아. 자신을 닦아세우며 석판과 과거의 기록을 확인하러 움직였다.)
당신은 레지스탕스 사람의 먹구름은 모두 짊어진 얼굴로 보관실로 향합니다.
무기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비밀 통로는 이제 익숙하게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몇 번을 오간 곳인데요. 손톱이 닳을 기세로 열고 닫은 문입니다.
석판을 조사하며, 레지스탕스는 과거의 지상 인류가 아주 융성한 문명을 이루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의 과학과 역사, 기술을 연구하며 브리니클과의 전투에서도 점차 승기를 잡고 있죠.
그러나 그토록 대단했던 지상 인류가 왜, 어째서, 어떻게 멸망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브리니클이 어디서 무엇을 위해 등장했는지도요.
……정말 이 순간이 과거라면, 역사에서 힌트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레지스탕스 본부의 보관소로 내려가면,
석판을 정리하던 켈러 씨가 반갑게 당신을 맞습니다.
켈러: 어, 왔어요?
오늘도 따끈따끈한 석판이 많이 들어왔어요. 어제 토벌이 성공적이었다면서요?
잘 다녀왔어요? 뭔가 더 눈에 띄는 건 없었죠? (묘하게 붉어진 얼굴로 안경을 고쳐쓰며 말한다)
시아록:켈러, 안녕하세요.
어제 토벌, 네.. 잘 하고 왔죠. (순간 꿈과 어제가 헷갈렸으나, 토벌이란 말에 집중했다. 어딘가 들뜬 것 같은 당신을 보았다.)
기분 좋은 일 있어요?
오늘따라 켈러 씨의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석판에서 굉장한 사실을 알아내면 꼭 저런 얼굴이었죠.
당신이 먼저 말을 꺼내면 켈러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줄줄 잇습니다.
서두는 언제나 그렇듯 석판에서 굉장한 사실을 알아냈단 겁니다.
켈러: 저번 해안 절벽 탐사에서 회수한 석판인데, 이거 봐요!
여태까지 발견한 석판 중에 가장 대단한 단락 같아요.
시아록:뭔데요? (당신이 들이미는 석판을 바라보았다.)
가장 대단한 단락이라니.
그렇다면 지상 인류의 멸망이나 브리니클의 기원 같은 것도 알 수 있게 된 걸까요?
켈러 씨가 가리킨 석판을 읽어보면...
핸드아웃: 남극의 유물
먼 옛날,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던 인류는 나날이 터전을 넓혀 갔습니다. 여섯 개의 대주에 만족하지 않고 다섯 개의 대양, 아마존의 밀림, 사하라 사막까지……. 지구의 모든 곳이 인류의 정복지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미지란 없습니다. 그러던 중, 인류는 남극의 빙하 아래 묻힌 동굴을 발견합니다. 그곳은…… 모든 우주의 보고였습니다. 엄청난 유물과 지식이 산처럼 쌓여, 아무도 모르는 차갑고 어두운 곳에 묻혀 있었던 겁니다! 가히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켈러:비행선이며 대포, 화약, 게다가 당신이 해독해 준 주문들까지. 여태 석판에 쓰여있던 것 중 굉장하지 않은 것이 없었잖아요.
그 대단한 과거의 인류마저 감히 ‘모든 우주의 보고’라고 부른 것들이에요.
얼음 호수의 동굴과 설원의 동굴까지 파괴하면 모든 석판이 모이겠죠?
그럼 우린 한 단계 더 발달한 문명과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거에요. 아아...!
꿈에 부푼 켈러 씨의 투명한 안경알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시아록:아.. (눈으로 석판을 읽어내리면서 배웠으나, 이게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가. 뭔가 잘 모르겠다.)
그렇군요..
(자신에게도 석판은 많은 지식의 보고면서도 가끔은 끔찍하게 여겨진다.)
아, 그러고 보면 우리의 마지막 행선지인 설원의 동굴도 여기서 말하는 남극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인류가 한 번 깃발을 꽂은 곳에, 몇백 몇천 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금 우리가 발을 딛는 거지요.
시아록:(꿈과 다르게 제대로 떠있다는 안도감에 차게 식은 숨이 내쉬어졌다. 주저앉고 싶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창밖을 내려다봤다.)
작은 유리 창문으로 호숫가를 들여다보면,
유진:발포 준비!
유진이 커다란 소리로 지시하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이어집니다.
지하에서 대기 중이던 레지스탕스 일원들이 화약을 나르고, 채웁니다.
조종석에서 발포 버튼을 누르면,
끼긱, 끼기긱. 새것 특유의 뻑뻑한 소리와 함께
선체의 구멍이 열리고 대포가 고개를 내밉니다.
유진:발사!
쾅!
요란한 폭음은 그 이후에 이어졌습니다.
덜컹, 짧은 흔들림과 함께 선체가 조금 뒤로 밀려납니다.
바닥에 떨어진 포탄들이 요란하게 폭발합니다.
붉고 노란, 노을보다 짙은 핏빛이 호수를 깨웁니다.
불길이 치밉니다.
호숫가 근처라 크게 번지진 못하겠지만,
동굴을 때려 부수고 브리니클을 노릇노릇하게 구울 정도론 충분할 겁니다.
그토록 오래 인류를 괴롭혔던,
어쩌면 과거의 인류조차 멸망으로 몰아넣었을 괴물들이...
스러지고 있습니다.
시아록:(이렇게 간단하게, 혹은 허무하게 모든 것이 끝나는 걸 그저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해야하는 걸까..)
브리니클은 화염을 안고 서서히 무너집니다.
머리 위에 명멸하던 빛은 꺼지고, 당신은 그 모든 풍경을 그저 눈에 담습니다. 시아록, 관찰력 판정.
시아록: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93
판정결과:
실패
완전히 무너진 동굴의 잔해 사이, 드문드문 브리니클의 잔해가 보입니다.
죽어나자빠져, 그저 돌덩이에 불과한.
하늘을 향해 솟은 팔들이 묘비 같습니다.
죽어가는 브리니클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불빛이 점멸합니다.
마치 마지막으로 힘을 끌어모으는 듯, 힘겨운 모양새.
짧게 한 번,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짧게 한 번,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짧게 한 번.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 길게 한 번.
...
고장난 것처럼 깜빡이는 불빛을 본 순간, 어떤 기억이 뇌리를 스칩니다.
핸드아웃: 초롱 신호
수중 인류는 커다랗고 투명한 해파리의 껍질을 잘 꿰매 그 안에 마법으로 만든 초롱을 밝힙니다. 가족 간에는 서로의 초롱을 멀리서도 깜빡거릴 수 있습니다. 초롱이 빛나는 길이와 횟수로 무전기처럼 가벼운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지상에 온 후로 쓸 일이 없어 잊고 지냈던 초롱 신호입니다.
당신은 익숙하게 그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Finally!
고개를 돌려보면, 모든 죽어가는 브리니클이
같은 속도, 같은 길이, 같은 박자로 빛을 깜빡이고 있단 걸 알게 됩니다.
우연일 거예요. 그럼요.
브리니클이 초롱신호를 알 리가 없잖아요.
그저 고장이 나서 불규칙한 걸 당신이 착각한 거겠죠.
시아록:(우연이라 되뇌이면서도, 어쩐지 그 초롱신호와 같은 불빛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불길할까요? 그저 착각에 불과할 텐데도.
드디어, 라니, 마치 브리니클들이…….
이 순간― 죽음만을 바라온 것처럼.
시아록:어째서...? (저조차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물어보기 위함인지, 아니면 그저 무언가의 탄식인지 알 수 없는 말이 제 목을 긁고 나갔다.)
...당신이 반쯤 벙쪄있는 사이, 일은 순식간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몇몇은 하강해 석판을 회수, 벽화를 탁본하고 돌아왔습니다.
죽어가는 브리니클은 어떤 위험도 되지 못했고,
본부에 복귀하기까지 걱정했던 추락 사태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애써 준비해 둔 차원의 관문이 허튼 일이 되었지만……
그래도 안 좋은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 게 나은 법이니까.
시아록:(꿈과는 전혀 다르게 훌륭한 비행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너무 긴장을 하고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땅을 딛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긴장이 탁 풀려서인지 어쩐지 맥이 빠진 느낌이에요.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레지스탕스에는 아무런 일도 없어요. 그저 약속된 평화만이 있습니다.
내일 나갈 결전에서도 정말로, 승리를 거둔다면...
마침내 도시는 브리니클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거에요.
도시의 경계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립니다.
승전보를 알리는 아틀란티카가 유유히 선착장에 내립니다.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이 느껴집니다. 돌아보면, 노아네요.
시아록:노아..?
노아:보세요, 아무 일 없었잖아요.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더 점검해보았어요. 이번 출항으로 아셨겠지만...
비행선은 안전해요. 그러니까 이제 겁 먹지 마세요.
아까 올라탈 때만 해도 하얗게 질리셔서... 정말 배를 멈춰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고요.
시아록:응.. 내가 너무 걱정이 많았지..
(당신에게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노아:아니면 멀미가 심해서 그러신 거에요? 멀미약 같은 걸 구비해둘 수 있게 준비할게요.
시아록:아니, 멀미는 안 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노아:...비단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조금이라도 승선이 편해지면 좋으니까.
시아록:응... 고마워..
(이렇게 대답했으나..., 그러나 자신은 안다. 이 배가 훗날 결국은 제가 있는 깊은 바닷속까지 떨어져내릴 것임을. 자신은 알고 있다.)
(그게 고작 지금이 아니라는 것에 자신이 안도해야할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노아:(몇 번이고 안심해도 된다고 말해보아도 여전히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않는 모습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내가... 이 비행선이 부족했던가. 자책이 어깨를 짓누른다. 우울한 감상은 이런 상황에서는 독이 될 뿐이라 이만 내려놓고 당신을 본다)
...응?
시아록, 발이 왜 그래요?
시아록:(당신과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웃었다.)
응? 내 발? ( 신발 잘 신고 있지 않나?)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발을 보면, 붕대가 신발구멍 위로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까 너무 정신이 없던 나머지 제대로 고정하지도 못했었죠...
그동안 분주히 뛰어다닌 탓에 올이 잔뜩 풀려 있네요.
시아록:아.. 그러니까.. 조금 다쳐서...?
노아:...괜찮으세요?
여간 작은 상처가 아니라면, 붕대까지 감으셨을 리가 없잖아요.
시아록:.... 안 괜찮은 거 같아. (괜찮다고 얼버무리려다가 결국 툭, 내뱉었다. 후들거리며 주저앉을 거 같은 다리는 전부 발이 아파서라고 해야겠다. 그래, 그런 것이다.)
(피가 비쳤던 발이라고 한들, 고작 이깟 것에 다리가 무너져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진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너에게 응석부리고 말았다.)
(슈슈를 닮은 너에게.)
노아:언제부터였어요? ...좀 더 일찍 봤어야 했는데, 여유가 없어서...
밤이 깊어지기는 했지만, 이오리 씨께 가 봐요. 지금이라도 가면 치료해주실지도 모르니까...
...비행선에서도 내내 상처를 달고 돌아다니신 거죠? (바닥을 딛는 것도 힘겨워 보였던 건 전부 그런 이유에서였나... 침음을 삼키며 부축해온다)
시아록:그럴까.. 지금 가면 이오리가 있으려나. (멀거니 발을 내려다보다가 부축해오는 너를 바라봤다.) 발을 안 쓸 순 없으니까. (한 발을 들어 슬쩍 흔들어 봤다. 욱씬거리는 통감이 역시 이곳에 자신이 있다고 알리고 있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며칠만에 이렇게 무너진 자신이 어쩐지 어처구니 없었다.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과는 다른 일인가 보다.)
노아:(쓴웃음을 짓는 당신의 얼굴이 떨리는 걸 피하지 않고 바라본다. 한동안 눈을 찌푸린 채로 그 얼굴을 살피다, 이내 두 번째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병원으로 향한다)
아픈 발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걷습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닌 둘이서.
별처럼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고, 보름달은 먹먹한 구름에 가리워지는 밤입니다.
저 멀리 철탑에서 반짝이는 벌건 불빛이, 다시금 아까 그 광경을 떠오르게 합니다.
...괜찮을까요?
아니, 괜찮을 리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괜찮아야 합니다. 적어도 마지막을 볼 때까지는...
노아:(어색한 공기가 다시금 사이를 파고든다. 스스로 여기까지 끌고 나오기는 했지만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모르겠다. 이오리는커녕 병원 문도 다 닫을 시간인데...)
(걸어가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말을 고르느라 몇 번 멈칫한다.) ...예전에, 비행선 이름을 지을 때 담당하던 사람들끼리 회의를 열었거든요.
시아록:응. (얌전히 네가 부축해주는 대로 따라 걸었다.)
노아:왜냐하면, 레지스탕스의 발돋움이 될 비행선인데 아무 이름이나 지어줄 수는 없잖아요.
시아록:그렇지.
노아:많은 의견이 나왔지만, 그 중에서도 하필이면 아틀란티카라는 이름이 채택된 이유가 있었어요.
시아록:그래? 왜?
노아:아틀란티카... 다른 말로 아틀란티스는 지금은 바다 아래에 가라앉았다는 전설의 대륙이거든요.
이상적인 국가였고, 지금 인류는 생각하지 못 할 만큼의 기술력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져 버린 곳이잖아요.
시아록:(... 듣자마자 왜 굳이 그 이름으로 지었어, 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너의, 우리의 배가 그렇게 바다 깊이 가라앉았나.)
노아:(당신의 속내도 모르고 말을 잇는다) 하지만 듣자마자, 꼭 그 이름으로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아틀란티카라는 이름을 들으니, 멸망한 지상의 문명이 떠올랐거든요. 지금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그 역사를 찾아볼 수 없다 해도... 결국은 인류의 재건을 돕고, 이렇게 비행선까지 구현하게 해 준.
시아록:... 그렇구나. ( 이미 지어진 배의 이름을 제가 떼를 쓴다고 바꿀 수는 없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목 뒤로 넘어갔다.)
노아:우리는 아틀란티카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거에요. 우리를 위협하고 영원한 상실로 몰고 가던 브리니클을 몰아내고, 이제 다치거나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 이렇게 안전지대같은 장벽에 가로막히지 않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이 될 테니까.
시아록:.... 그래.. (네게는 그 이름이 좋은 의미이지만, 역시 나는 아틀란티카라는 이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노아:아틀란티카는 지금은 사라진 꿈이지만, 그렇게 무너진 꿈이라도 우리가 갈 수 있는 길로 이정표를 제시해 주죠.
시아록:(그 곳이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노아는 그때 제시한 이름 있었어? 아틀란티카,는 듣고 그렇게 생각했다며?
노아:...인류의 재건뿐만 아니라 모든 게 그러할 지도 몰라요. 무너지고 끝나버린 꿈도 언젠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 될 테니까.
... ... 그러니까, 이만 놓아줄 때가 온 거겠죠.
이름... 저는 방주 같은 걸 생각했는데, 은근슬쩍 저한테 유리한 이름을 붙이지 말라고 타박을 받았었죠.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도 잘 어울리지 않아요? 방주.
시아록:아, 노아의 방주. (따라 웃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응, 나도 그게 더 좋은데. 방주. 아틀란티카보다 더.
훨씬, 나아.
(저도 모르게 강조하듯 말해버렸다.)
노아:(당신이 웃는 얼굴에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걷는다) 그렇죠? 음, 하지만 생각해보니 방주랑은 다르게 노가 없어서, 연료가 없으면 금방 멈출 텐데.
...하, 하늘에 뜰 수 있으니까 된 거겠죠? 언젠가 기술이 더 발달해서 정말 배도 되고 비행선도 되는 그런 게 나오면 좋겠어요.
(병원이 있는 건물의 지하를 따라 내려간다. 문은 굳게 잠겨 있다.)
...아, 이런.
시아록:그때의 물은 산보다 더 높게 올라왔다며? 그럼, 그쯤의 물높이나 비행선이 날아다니는 높이나 비슷한 거 아니야?
아.. 괜찮아, 나 열쇠 있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열쇠를 꺼냈다.)
노아가 대강 약 좀 발라줘.
노아:그런가...? (거기까지는 잘 모르는지 고개를 숙이다가)
알겠어요. (문을 여는 대로 부축하며 따라 들어간다.)
병원은 역시 쥐 죽은 듯 조용합니다. 간간히 입원 환자가 코를 고는 소리도 들려오네요.
세상은 모두 잠들어 있습니다.
진료실로 들어가 적당한 곳에 앉아 있으면, 노아가 선반을 뒤져 구급상자를 꺼내 옵니다.
신발을 벗기면, 당신의 생각보다 상처가 훨씬 큽니다.
붕대는 얼기설기 풀려 있고, 발은 멍과 생채기로 얼룩덜룩해져 있으니까요.
피가 배어나오던 상처는 모두 굳었지만, 여전히 낫지는 않아 만지기만 해도 따끔따끔합니다.
으, 역시 응급처치도 제대로 안 하고 돌아다닌 건 무리였어요.
당신이 이제야 제대로 보여준 상처를 마주한 노아는 깜짝 놀랍니다.
노아:...세상에.
어, 어쩌다가 발이 이렇게 됐어요...? 어제 갔던 탐사에서 위험한 일이라도 있던 거에요?
시아록:어? 어..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어젯밤의 꿈과 그 일련의 과정은 얘기하기 쉽지 않아서 그저 머슥하게 웃으면서 뒷목을 매만졌다.)
노아: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부턴 제대로 치료받고 돌아다니셔야 해요. 제대로 연고라도 발라두지 않으면 감염의 위험도 있고, 곪을 수도 있으니까.
시아록:응, 그럴게. 혼자 하려니까 안 쉽더라고. (네가 약을 발라주는 것을 가만히 보았다.)
노아도 이제 레지스탕스잖아요. 제 손으로 응급처치 몇 번쯤은 해 봤을 텝니다.
그 어렸던 애가 이만큼 자라선, 무기를 들거나 당신을 치료해주고 있다니...
감회가 새로울지도 모르겠어요.
노아:
응급처치
기준치:
60/30/12
굴림:
86
판정결과:
실패
(부, 붕대를 이렇게 감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 손길은 영 엉성합니다.
제대로 하고 있는 건 맞겠죠?
아무튼 얼렁뚱땅 연고(맞게 바른 건지도 모르겠어요)를 바르고, 거즈를 붙인 뒤,
붕대까지 고정하고 나면 비로소 치료 끝입니다.
...붕대가 좀 헐렁하긴 하지만요. 아무래도이따 다시 감아봐야겠어요.
이제 됐다며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문득 주머니에서 무언가 굴러떨어집니다.
시아록:(뭐지?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집어보면, 작은 구슬같은 그것은...
진주입니다. 사해에서 주운 그것인가 봐요.
노아는 진주를 보고 아는 체를 합니다.
노아:아, 그거 제가 주운 건데...!
아까 찾을 땐 없었는데, 어디 갔었어요?
시아록:어, 네 주머니에서 떨어졌는데? 여기. (네 손을 가져다 펴 그 위에 진주를 올려놓았다.)
노아:아... (잃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진주를 받아들었다)
... (잠시 제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시아록. 이건 다시 바다에 돌려놓을까요?
시아록:응? 왜, 갑자기?
팔려고 가져온 거 아니었어? 그렇지만... 네가 그렇고 싶다면 그렇게 해.
노아:그, 비행선도 완성됐고, 어차피 전에 판 진주 덕에 자금은 충분히 모였고.
바로 내일 침공에 성공하면, 더 이상 군사 자금을 대지 않아도 되니까...
시아록:그것도 그렇네..
노아:그리고... (입을 꾹 물고 숨을 삼켰다가)
바다에서 온 것들은 다시 바다로 되돌아가야 하니까요.
바다에서 난 것은 모두 물을 닮아서, 어딘가에 머무르기보다는 자유롭게 흘러가야 한다고 해요.
시아록:그런가... 근데, 그렇게 안 해도 나중엔 바다로 결국 돌아가더라고. (지금껏 겪어본 바 그랬다. 결국 모든 것들은 바다로 돌아왔다.)
노아:그런가요. (말을 멈추고, 신발을 다시 신겨주고 신발끈까지 제대로 묶어준다. 다시 풀리지 않도록)
...말이 길어졌네요. 이만 돌아갈까요? 날이 늦었으니까.
시아록:(오늘은 너를 참 많이 들여다보는 것 같다. 시선이 네가 묶어주는 신발끈으로 향했다가 일어선 너를 올려다보았다.)
응, 돌아가자.
(그렇게 일어서다 문득 생각났다. 꿈이었던가 어제였던가, 아직도 헷갈리는 기억을 붙잡고 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노아, 갖고 싶은 거 있어?
우리는 보름달 아래를 걷습니다.
왼쪽에는 슈슈...는 없지만, 오른쪽에는 노아가 함께합니다.
문득 당신은 뭍에 처음 올라오던 날을 떠올립니다.
모든 게 신비로웠던 날을,
영원할 것 같았던 평화와 새로운 모험의 두근거림을.
빈말로라도 평화롭다고 할 수 없는 밤입니다.
하지만 어둠에 잠긴 도시는 아주 고요합니다. 파도 치는 소리가 멀리에서 희미하게 흘러들어올 만큼.
노아는 사해의 해안선을 따라 걷다가 당신의 말에 흠칫합니다.
노아:갖고 싶은 거요...?
...어, ... 평화와 모험?
시아록:아니, 그거 말고. 내 물건 중에? 아니면 선물 같은 거.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노아:당신 물건 중에서...? (여전히 바다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희미한 달빛이 윤곽선을 그리고 등은 그림자에 먹혀 있다)
......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송별회 날 선물로 주시려고요?
시아록:네가 원하다면, ..송별회... 그럴지도 모르겠네.
(너를 보다가 달을 올려다 봤다가 다시 바다로 시선이 향했다.)
노아:(...바다에서 온 것들은 물을 닮아서, 흘러가려는 속성이 있다고 했던가.)
...필요없는 것 중에서 아무거나 던져주세요, 뭐든.
시아록:(똑같은 말이다. 역시 어제였나, 아니면 꿈이었나..)
나한테 필요없는 건 없어, 그러니까 갖고 싶은 걸 나중에라도 말해.
노아:그런가요? 음, 그럼...
역시... 사진은 어때요? 전에 석판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계의 제작법을 발견했다고 했잖아요.
송별회 날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사진에 담는 거죠. 그럼 당신의 물건을 뺏지 않아도 되지만, 추억은 남길 수 있으니까.
시아록:그래, 좋아. 사진..
노아:...갑자기 왜 이런 소리가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당장 그 때까지 사진기를 만들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음, 슈테른 씨도 같이 사진에 나오면 더 좋겠어요. 오래 만나지 못했지만, 제게도 왠지 가족처럼 느껴지는 분이니까.
시아록:응 .. 알았어. (작게 입김을 하, 불었다.)
그러게, 나도 그럼 좋겠어.
노아:...아, 바닷바람이 차죠. (손에서 어떤 감정과 함께 진주를 탁 털어냈다)
(해변에 던져넣으면 얕게 파문이 일더니 곧 파도가 진주를 데려간다)
...자, 됐네요. 이제 정말 돌아가요.
시아록:응, 가자. (너와 어깨를 맞춰 천천히 기숙사로 향했다.)
오늘따라 바람도 유난히 잠잠해요. 하늘은 흐릿하고요.
소음이라곤 모두 잡아먹힌 밤.
유독 조용한 틈이라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 파고듭니다.
그러고 보면, 다시 바다로 돌아가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바로 지척에, 아틀란티카와 인류 문명이 고스란히 파묻힌 유적지가 있는데 말이에요.
당신이 어떻게 이 자리에 서 있는지,
다시 그 날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요.
여전히 보름달은 떠 있고 세계는 어떤 답도 내놓지 않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이 형용하기 힘든 감정은 정말 지상세계가 평화로워진다고 사그라들까요.
매일 밤 어둠과 함께 고뇌가 이불처럼 덮이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손안에 있는 주문이 힘이 되기를 바랄 뿐이에요.
당신은 고민이나 걱정거리마저 베개 밑에 묻어두고 잠을 청합니다.
좋은 꿈 꾸길.
―
과거를 걷는 시간
...그것도 모두 어제의 일입니다.
당신은 짧은 전투를 마치고 레지스탕스 본부로 귀환했습니다.
지금까지 아틀란티카가 다녀온 곳은 모두 완전 격퇴에 성공했지만...
다른 도시 지역에 잔당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거든요.
다행히 동굴에서 본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개체였지만,
그래도 안전을 위해 핵의 붉은 빛을 꺼트렸습니다.
파악, 우지끈! 귓가에 브리니클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아직 선명합니다.
다행히 글씨가 새겨진 부분은 전부 본을 떴으니, 바로 해석에 들어갈 수 있을 거에요.
다만, 신경쓰이는 게 있다면...
깜빡, 깜빡.
브리니클의 핵이 다시 점멸했다는 것 정도일까요. 저 높은 빌딩 위에 매달린 붉은빛처럼요.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 다시 짧게 한 번...
...
하지만 당신이 해석하기도 전에, 불빛이 스위치를 내린 듯 팍 하고 꺼져버렸죠.
활자가 되지 못한 단말마는 결국 화마에 녹아 부서져내렸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브리니클의 개체수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렸거든요.
유진:내일은 드디어 마지막, 설원의 동굴로 간다.
모두 출전 전후로 체력을 보존하고, 무사히 생환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무너진 기지는 수복할 수 있지만, 인명 피해는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명심하고.
유진도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었죠.
그런데 왜 승전보를 올리고 돌아온 당신이...
노아:시아록, 거기 뭐라도 있어요?
...왜 노아와 함꼐 교외에 나와 있느냐고요?
답은 간단해요. 얼결에 노아의 이사 준비를 돕게 됐거든요.
당신이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발은 다 나았냐고 묻더니,
준비를 좀 도와달라고 했었죠.
노아:아,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얼른 가야죠, 병원.
노아는 이번 전투가 승리로 끝나면,집을 비울 것이라고 합니다.
도시가 안전해진 만큼 예나를 떠나 다른 곳을 돌아보고 싶다면서요.
그런 노아가 첫 번째로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행선지는....
이오리의 병원입니다.
시아록:(늘 제 발로 찾아오던 병원을 오랜만에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 병원에 왔다. 노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가 물었다.)
병원에 왜?
(늘 슈슈를 보러 왔더니 다른 용건은 크게 생각나지 않았다. 다쳐도 슈슈를 보러 왔다가 이오리에게 잡혀 치료받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노아:왜냐뇨, 당연히 악몽 때문이죠.
계속 안 좋은 꿈이 이어지면 수면에도 영향이 가고, 그럼 내일같은 큰 작전에서 무슨 차질이라도 생길 수 있잖아요.
이오리한테 진작 말했으면 수면제라도 처방해줬을 텐데... 왜 지금까지 안 간 거에요. (조금 속상해보이는 눈치로 타박하듯 묻는다.)
시아록:(저는 생각지도 못한 관점에 조금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가.. 그러게, 그런 방법이 있는데..
(꿈을 꾸면 늘 자신을 다스리는데 급급해서 식은땀이 사라지고 나서 정신을 차리면 늘 그걸로 되었다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꿈이야기를 해야할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생각에 피한 건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 마지막에 다가와 안심되어서 너에게 얘기한 걸까. 아니면 네가, 그 얼굴로, 털어놓으라 종용해서일까.)
노아:(티나지 않게 작은 한숨을 쉬고) 앞으로는 저도 없을 텐데 그러시면 어떡해요. 아플 때는 병원의 도움을 받으려고 해 보세요.
어차피 저 대신 걱정해주실 분도 있으니 안심해도 될 것 같지만.
시아록:(네 말에 돌아가면 이런 병원은 없는데. 라고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노아는 어디까지 여행갈 거야? 저 멀리? 나중에 돌아올 거야? (그 때는 자신이 없을 지도 모르지만, 그냥 네가 이 곳으로 돌아온다고 하면 좋을 거 같았다.)
노아:음... 사실 행선지같은 건 잘 모르겠어요. 아틀란티카의 항로를 참고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직접 가 보려고요.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는 호신용 무기라도 있으니까... (쓸 일이 없다면 좋겠지만요. 손에 들어오는 권총 하나를 툭툭 건드려보인다)
네, 저 멀리까지 가서, 돌아올 엄두가 안 날 만큼.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내고 싶어요.
여태 브리니클과... 레지스탕스에 들어가서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 떄문에 이 곳에 머물렀는데, 아직 가 보고 싶은 곳이 많으니까요.
아무도 절 모르는 곳에 가서 제 거처가 될 곳을 찾는다면... 그걸로 만족할 거에요. 음, 찾지 못한다면 꼼짝없이 여기로 돌아와야겠지만.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린다)
시아록:그렇구나. (너는 여기를 떠나고 싶었구나. 어쩌면 너는 브리니클에 완전히 질려버린 걸지도 모르지. 저도 돌아가게 되면 브리니클을 생각하고 싶지 않을 거 같으니 이해는 된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되면 좋겠네. (네가 돌아오면 좋을 거 같다고 막연히 생각해도, 너에게 그게 행복이 아니라면 나는... 네가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 의사따위는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이 밖의 땅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겠지만, 네가 머물 곳 하나 없겠어? (나는 너를 따라 웃었다.)
노아:이미 없어진 것을 계속 매만지고 추억하기에는 삶이 너무나 길고, 이 도시는 추억으로 남기겠다는 결심이 섰어요. 정이 든 곳이지만, 그런 곳이니만큼 한 번쯤 떠나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오리나 유진,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면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 감사해요. 다시 이정표를 찾고, 깃발을 꽂고 정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머물 곳 하나쯤은 있겠죠. (가볍게 끄덕거리며 이오리네 병원을 향해 내려간다.)
노아는 한창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니... 병원 문을 열고 당신을 무작정 끌고 갑니다.
노아:이오리, 여기 있어요?
그러고는 진료실 문을 냅다 열어 안을 들여다보네요.
이오리:아, 노아 왔... 단골 손님도 왔네.
친구를 보러 온 거니? (시아록에게 눈짓한다)
시아록:하하.
(작게 웃었다가 노아를 눈짓했다.) 노아한테 끌려왔달까..
이오리:몸에 문제라도 생겼니? 이제 과로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게 며칠 전 일 같은데 말이야.
(제법 엄한 눈초리로 꼬았던 다리를 펴고 고쳐앉는다.)
노아:아뇨, 과로가 문제가 아니고... 요즘 계속 악몽을 꾸신대요.
그래서 많이 불안하시고, 잠도 못 드시나 봐요.
시아록:(과로란 말에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다가 노아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특히나 어제는 정말 쓰러지시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팔짱을 끼고 한숨을 뱉는다)
도저히 그냥 못 보고 있겠어서 이렇게 데려온 거에요.
시아록:(괜히 혼난 기분에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이오리:계속 악몽을 꾸는 건 신경과 관련된 증세인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명확하게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아. 일상생활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냥 넘어가도 괜찮지만...
그 말을 들으니, 처방이 필요해 보이네. (차트에 무언가 기록하더니 처방전 하나를 내민다)
저쪽 약국에 이 수면제가 있어. 깊게 잠들면 수면의 질이 올라가고, 그럼 꿈을 꾸는 횟수도 줄어들 거야.
(볼펜으로 처방한 약을 톡톡 건드리며) 자기 30분 전에 한 알씩 먹고, 우선 일주일분을 처방해줄테니 경과를 보고 다시 오렴.
이오리는 별 일은 아니라며 약 하나를 처방해줍니다.
이걸 먹으면 그런 꿈을 조금이라도 덜 꾸게 될까요?
시아록:(별 것 아니라는 말에 조금 안도했다. 처방전을 받아들며 적힌 약 이름들과 이것저것 살펴보지만, 사실 아는 건 없다.)
약 처방해주셨으니 괜찮을 거 같아요.
이오리:그래. 힘들면 다시 와. (이만 가도 좋다는 듯 손을 휘저어 둘을 내보낸다.)
그렇게 진료실에서 쫓겨납니다.
이오리네 병원은 원래 진료비를 받지 않죠. 처방전을 받아들고 바로 약을 사러 가면 됩니다.
노아는 약국 이름을 보더니 안전지대 안에 있는 약국이라고 알려줍니다.
노아:수면제 같은 건 아직 비싸니까, 안전지대까지 들어가야 하는 거겠죠...
어차피 제 집에도 들러야 하니까, 가는 길에 들리면 되겠네요.
(처방전을 받아들고 가방을 한 번 고쳐맨다)
시아록:응, 알았어. 가자. (네가 챙기는 걸 보고 천천히 따라간다.) 수면제부터 처방받고, 노아네 집에 가는 게 나을까?
노아:아마 그게 편할 걸요. (성큼성큼 앞장서고) 그 쪽으로 들어가는 건 오랜만이에요.
시아록:그렇지. 나도 레지스탕스 기숙사에서만 지냈고..
노아:가끔 짐을 가져올 때만 들렀었는데 많이 바뀌어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높은 장벽 한구석의 개구멍으로 들어간다)
다시 찾은 안전지대는... 세상에, 거의 다른 세상입니다.
온갖 건물마다 빛나는 간판이 달려 있고, 도로는 매끈하게 포장되어 있으며,
차뿐만 아니라 이상한 보드며 바퀴처럼 생긴 것이 인도를 달리고 있거든요.
곳곳에 신호등이 달려 있고, 어디 하나 무너진 곳이 없습니다.
게다가 처음 보는 이상한 기기도 있습니다. 전화기랑은 다른데, 대체 이게 뭐지?
시아록:(처음 왔을 때와도 전혀 다른 모습에, 놀랐다. 밖이랑 이렇게 다른가..)
석판에서 발견한 기술은 레지스탕스 전술에 이용할 수 있었지만,
제일 많이 득을 본 곳은 안전지대 안이죠.
이 곳에는 시간을 들여 신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 인력과 자원, 돈이 모두 갖춰져 있으니까요.
게다가 브리니클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니, 만들어진 것이 부서질 걱정은 안 해도 되고요!
그러니까 경계 안은, 일종의 미래도시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대로변을 걸어 약국으로 향합니다.
지폐를 건네고 약을 받아들다 보면, 약국도 바깥과는 전혀 다르네요.
곳곳에 약 뿐만 아니라 연구용 선반 같은 것도 보이고요.
깔끔하게 정돈된 내부는 약국이라기보단 연구실 같은 걸 생각나게 합니다.
놀랍네요. 정말 한 20년 후에 떨어진 느낌이에요.
약 처방이 끝나면 이번에는 노아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계단을 올라가고 올라가면 보이는, 높다란 언덕 한 켠에 있는 작은 빌라.
노아의 집 문 손잡이에는 먼지가 더께 쌓여 있습니다.
여태 비워둔 집이니, 뭐라도 살지 않을까 걱정이기도 하네요...
노아:들어오세요. (커다란 가방을 매고 문을 열어주며)
노아는 집에 있던 가구는 모두 놓고 가는 대신,
중요한 물품만을 챙길 가방을 하나 들고 왔습니다.
시아록:응. (정말 오랜만에 와보는 너의 집이다.)
이사를 도와주는 대가는 다름아닌 이 집입니다.
바다로 돌아갈 당신에게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팔기에도 뭣하니, 쓰고 싶은 대로 쓰라고요.
다행히 안전지대 안에 있는 집이라서인지 쥐나 바퀴벌레 같은 것과 인사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눈에 익어버린 내부가 눈에 들어옵니다.
들어오자마자 왼편에 화장실이 하나. 거실에는 소파와 작은 탁자. 그 옆으로는 골목이 한눈에 보이는 베란다가 하나. 안쪽으로 방이 두 개.
노아는 거실부터 향하더니 이것저것 뒤지기 시작합니다.
한참을 기다리고 노아가 돌아오면... 세상에!
가방에 집을 다 담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짐이 큽니다!
가방을 맨 노아가 그 무게에 비틀거릴 정도니까요.
시아록:..노아, 그거 다 들고 다닐 수 있겠어? (휘청이는 당신을 붙잡는다.)
노아:...헉, 헉. 필요한 것만 들고 왔어요.
전화기는 아직도 멀쩡하고, 선반은 그냥 통채로 담아왔는데...
자, 잘 모르겠어요. 들고 갈 순 있으려나... (저절로 새우마냥 등이 굽어진다)
시아록:선반에 뭐가 있었는데...? (당신의 등에 매인 짐을 다시 보고 질린 눈을 해버렸다.)
노아:어... 그냥 이것저것이요. 책도 있고 앨범도 있고 인형이나 라디오도 있고...
그 밖에도 엄청나게 잡다한 물건들의 목록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이런 건 좀 두고 가도 괜찮지 않나?
시아록:... 지금 정리해서 가방에 다시 담자. 이 가방으로 그 구멍 통과도 못할 거 같아..
노아:(...너무나 맞는 말이라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하지만, 다 어딘가에는 쓸모가 있을 텐데... (쓸데없이 미련이 가득한 눈...)
시아록:그건 그렇지만, 너 지금 그거만 매고도 비틀거리고 있잖아. 구멍도 못 통과하고, 여행도 몇 걸음 못 갈 걸?
(당신의 미련 가득한 눈을 보고, 단호하게 현실을 자각시켰다. 가방에 손을 대보니, 대체 이걸 어떻게 매었나 싶었다.)
가방 내려놔...
노아:(어쩐지 혼나는 기분이라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그렇네요... (어쩔 수 없이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한다)
음, 역시 벽걸이 시계까지 들고 가는 건... 좀 그렇죠.
그리고 노아의 가방에서는 웬 살림이 다 나오기 시작합니다.
시아록:벽걸이 시계는 왜 챙긴 건데? (기함하며 시계를 당신의 손에서 빼냈다.)
온갖 상자며 전자기기 같은 무거운 것부터 부채나 빗 같은 사소한 것까지...
그 와중에 종류별로 하나씩 챙겼네요.
....노아는 이사를 하면 안 되는 사람 같습니다.
이래서야 대체 살던 마을은 어떻게 떠나겠다는 건지.
당신의 등쌀에 하나하나 짐을 내려놓고 정말 필요한 것만을 챙기면,
그제서야 사람이 들 만한 가방 크기가 됩니다.
노아도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가방을 매고요.
...집 떄문이 아니더라도 따라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아:(비상식량이나 정말 중요한 앨범 같은 것만을 남긴 가방을 툭툭 턴다...)
...근데 저 동화책은 진짜 들고 가면 안 돼요? 어릴 때 자장가처럼 듣던 건데. (말하며 10년은 더 되어 보이는, 표지와 책등이 분리되는 낡은 책을 쥐어들고)
시아록:(너덜한 책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챙겨가도 되겠지만..., 돌아갈 때 서점에 들리자. 네가 읽고 싶은 책이나 동화책 한 권 내가 사줄게.
노아:아, 서점은 어차피 들리려고 했어요. 시장가에도 한 번은 가야 하니까... (당신의 허락에 기쁜 낯으로 동화책 하나를 가방에 넣는다)
그럼 이제 광장 쪽으로 가 볼까요? (자리를 짚고 일어선다)
가서 살 것들이 많아요. 팔 것도 많고.
시아록:응. 음... 가방 내가 들어줄까?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이제 끝나고 여행하면 내내 매고 다닐 거니까. 오늘은 내가 들어줄게.
노아:네? 전 괜찮은데... ...음, 들어보고 무거우시면 다시 돌려주시는 거에요. (하긴 가방을 대신 들려지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순순히 가방을 건넨다)
시아록:(시사/ 경제 분야는 슬쩍 보고 후다닥 도망쳤다. 역사 분야에 들어서 책을 집어들었다.)
역사책을 아무거나 집어들면...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록]이라는 제목의 책이 잡힙니다.
읽어보면, 인쇄의 역사를 다루고 있네요. 인류가 남긴 여러 가지 기록 방식이 시대별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금속활자, 인쇄기... 그 다음에는 재료가 나열되고요. 나무와 종이가 가장 대표적이며,
더 오래 전으로 흘러가면 석판, 아예 선사 시대까지 가면 동굴 벽.
... 그런 내용이 이어집니다. 조금 지루할지도 모르겠어요.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다면 더 자세히 읽어볼 수도 있습니다.
시아록:(바다에선 뭔갈 기록하기도 그리 쉽진 않은데..선사시대의 동굴벽과 석판에 관해 살펴본다. 뭔가 브리니클의 석판 같은 것도 생각나고....)
석판 부분을 훑어보면, 인류가 극초기에 사용한 방식이라는 말만 나와 있네요.
그러고보면 예전에, 최초의 석판이 남극에서 발견되었다는 설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저 흘려 넘겼는데, 생각해보니 켈러 씨가 말하던 남극의 유물과 석판이 어느 정도 겹치네요.
시아록:(별 거 없네.. 무료한 얼굴로 책장을 넘겼다. 이제 브리니클 해치우러 갈 건데.. 뭐, 진짜 아무 것도 없고.. 콧잔등만 찡그리며 책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면 브리니클의 본거지도 남극에 있다고 했었죠.
이 모든 건 그저 우연일까요?
...당신은 과학 쪽의 책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시아록:(아직도 책을 고르는 것 같은 노아를 보다가 과학 분야의 책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읽는다고 자신이 알까마는 그냥 한 번쯤 읽어보기로 했다. 콜드슬립에 관한 것도 있으려나.)
콜드 슬립에 관한 책자라면... 있습니다.
하지만 향후 이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같은 상투적이고 지루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네요.
그 옆에 있는 책을 펼쳐보면, 타임 패러독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이론이죠.
과거를 바꾸면, 반드시 그 미래도 영향을 받는다고 했던가요.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 조금이라도 인과율에 영향을 끼치면... 심하게는 나라 하나가 없어지는 커다란 나비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당신이라면 그냥 읽고 지나치기 힘든 내용이겠네요.
수중 인류는 지상 인류의 멸망으로부터 기원된 존재들이잖아요.
그럼 당신이 이대로 멸망을 막을 방법을 찾아,
그들의 미래를 만들면...
동시에 당신의 미래는, 당신이 슈슈와 돌아갈 곳은 없어지고 맙니다.
아니, 애초에 당신과 슈슈는 수중 인류니까, 둘 다 사라질지도 모르고요.
시아록:(미래에 대한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나는 이미 내 현실에서 과거로 와서 이렇게 많은 것을 내 멋대로 바꾸고 행동하고 있는데... 내 현재까지의 과거에서 내가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멸망하고서 바다까지 사람들이 흘러들어온 건지. 아니면 나는 이미 바꾸고 있는지... 내가 내 현재로 돌아갈 때까지 알 수 있을까? 내가 멸망을 막았을 때 이 지상은 이대로 남아서 내 고향을 없애버리는가? 아니면 내가 막았다고 해도 또 다른 미래에 멸망해버리고 바닷속의 마을을 생겨나는 건가? 그리고 슈슈는? 나는? 마을 사람들은? 많은 가설들이 머릿속에서 하나로 혼재되어 이내 두통이 찾아왔다. 마른 세수를 하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슈슈를 연표의 기준으로 삼고... 슈슈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바로 돌아가리라 생각했습니다.
지상의 멸망이나 존속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었죠.
당신은 거대한 인과율에 손을 대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멸망으로 다가가게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당신이 어떤 짓을 해도 인류가 멸망했을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이대로 지상 인류의 미래를 연장한다면, 그로 인해 평화를 누리는 이들 때문에,
가라앉아 수중 마을을 구성할 인간들과 유적지의 절벽들...
그런 것들이 가라앉지 못한다면, 이대로 브리니클이 모두 없어져버린다면.
그리하여 당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거나, 슈슈와 돌아갈 미래가 없어진다면.
당신은 괜찮은가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도... 버틸 수 있나요.
시아록:(결국 마른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책장 사이에 쪼그려 앉았다. 세상이 나한테 너무 잔혹한 거 아니야? 낮게 중얼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욕심쟁이라 당신들도, 또 당신들도 놓을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만약 슈슈와 당신들을 놓고 저울질 한다면 나는, 감히 슈슈만 선택한 채로 침몰할 테다. 오롯이 나의 선택(잘못) 하나로 일어날 그 모든 인과에 나는... )
(모든 걸 떠안고 가라앉을 것이다.)
세상이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잔혹하고, 한낱 인간이 받아들이기엔 난해할 만큼 복잡합니다.
심지어는 답이 규정되어 있지도 않아요.
어쩐지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 됩니다. 지상 인류의 멸망을 이대로 두고 보는 건 옳은 일일까요?
수중 인류가 사라지게 하는 것은요.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감히 당신에게 손가락질 할 이는 없습니다.
당신이 모든 죄업을 떠안고 슈슈와 심해 바닥에 닿는 동안,
비난할 이는 모두 죽고 없을 테니까요.
...제 생각에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과거로 돌아왔잖아요. 이건 어떠한 계시일지도 모르고 기회일지도 몰라요. 슈슈와 수중 마을의 몰락을 막을 수 있는.
그런 생각과 함께 숨죽여 앉아 있으면, 저 멀리에서 노아가 다가옵니다.
들고 온 것은 모조리 여행에 관한 책이네요.
세계 각국의, 걸어서 갈 수 있는 관광지부터 이동 수단의 힘을 빌려야만 할 만큼 먼 관광지까지...
앞으로 그의 미래가 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노아는 머리를 감싸고 있는 당신을 보곤 묻습니다.
노아:...시아록? 책 읽어요?
무슨 책이에요? (이 쪽을 힐끔거리며)
시아록:(당신의 물음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본 품에 들어찬 당신의 여행에 관한 많은 책들이 다시금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결국 슈슈를 놓치 못한다. 그러니 너의 여행이... 네가 만족할 만큼 이어지기를. 그 바람을 뱃속에 집어넣은 채로 어설프게 웃었다.)
그냥 아무거나 집어든 거였어...
(타임패러독스에 대한 책의 표지만 네게 보여주고는, 금방 책장에 꽂아버렸다.)
노아:<시간 역설로 말하는 물리학>...? 어려운 거 읽으시네요. (잘 모르는 주제인 듯 고개만 한 번 갸웃하고 만다.)
(책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얼굴을 감싸고 계셨나? 멋대로 오해 아닌 오해를 하곤) 그,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날 때부터 지상 인류였던 저도 잘 모르는 내용인데...
앞으로 차근차근 배우면 되잖아요. 배, 배울 수 있는 내용이 많다는 건 깨달을 때의 즐거움도 많다는 거니까 좋은 게 아닐까요...?
시아록:으응.. (쓰게 웃었다.) 나도 잘 모르겠더라.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냥 눈에 띄었을 뿐이었어. 노아는 책 다 골랐어?
노아:아, 네. 이 정도면 고를 건 다 골랐어요.
지구 저편에 핀란드라는 땅이 있는 거 아세요? 그 나라는 남극, 이라는 곳만큼이나 설원에 파묻혀있대요.
아이슬란드라는, 저쪽의 조용하고 책도 많이 읽는 섬도 있고요. 아니면 화산 폭발로 유명한 섬나라나 모든 게 거울처럼 비쳐 보이는 소금 사막도 있어요.
세상은 생각보다 아주 넓네요. 여태 관심이 없어서 몰랐어요.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쪽으로 또 놀러오세요. 만에 하나 마주친다면 곳곳에서 찍은 사진이라도 나눠드릴게요.
시아록:브리니클만으로도 정신없었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다가) 좋아. 갈 수 있다면 갈게. (갈 수 있다면...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책 표지의 오로라 사진을 보여주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당신이 이걸 못 보는 건 아쉽지만 바닷속에는 인류도 모르는 더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테니 괜찮겠다는 말도 덧붙이고요.
책 대신, 여러 무거운 생각들을 안고 나옵니다.
이제 정말로 일과는 마쳤으니 돌아갈 때죠.
밖은 벌써 해 질 녘의 오묘한 색깔이 해 주변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햇빛을 등에 지고 옆에서 걸어가던 노아는 문득 말합니다.
노아:내일은 눈이 온대요.
신기하죠. 여태 날이 맑았는데.
그 북극이라는 곳에는 워낙 자주 온다고 하니까...내일 출전하면 거기서도 볼 수 있겠죠?
(잠시 옆머리를 꼬며 말한다. 이내 그게 본론은 아니었던 듯 다시 입을 열고)
저, 슈테른 씨랑 겹쳐본 적 있었죠.
시아록:(눈 얘기에 집중하다 갑작스러운 말에 눈이 커졌다. 1초, 2초, 극히 짧은 시간 후에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으로 낮은 웃음 소리가 나와버렸다.)
슈슈가 콜드 슬립이 아니라 만약 나와 발 맞춰 자랐다면 노아랑 닮았으려나 그런 생각하긴 했지만. 있잖아, 노아.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너와 슈슈를 겹쳐보거나 같은 사람처럼 착각한 적 없어. 잠결조차. 너랑 슈슈가 다른 사람이란 건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건 슈슈한테도 너한테도 실례잖아.
노아:...본인도 모르셨죠? 지금은 아니고, 전에 가끔 그런 시선을 느낀 적이 있었어요. 하도 일만 하셔서 병원에 가니 마니 옥신각신할 때. (턱에 손을 얹으며 이야기한다. 슈테른은 낄 리 없는 가죽 장갑에 나이에 맞지 않게 굳은살이 박힌 손.)
노아는 끄덕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모로 기울입니다.
...그러고 보면, 노아는 슈테른과 약속이라도 한 듯이 머리를 죽 풀고 다녔습니다.
가끔 작전을 나갈 때 편의를 위해 묶기는 했지만,
그것도 두 갈래로 묶거나 옆으로 묶은 적은 없었죠.
그냥, 언제부턴가 그랬습니다.
일단 이 쪽을 똑바로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상하거나 화난 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 생각도 없어 보여요.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건지.
시아록:노아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 글쎄, 그래도 난 노아랑 슈슈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도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잘못한 거겠지.
노아:아, 사과받으려고 한 소리는 아니었어요. 저도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알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앞으로 슈테른 씨를 볼 때 저를 겹쳐보거나 떠올리지는 말라고, 하고 싶었어요.
그 때에 전 이미 이 곳을 떠나고 없을 테니까. 아예 죽은 사람처럼, 그리워하지도 말고 떠올리지도 말아 달라는.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노아:전 그럼 이삿짐 정리하고, 오필리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서 선착장에 잠시 들렀다 갈게요.
시아록:(차분한 당신의 말을 들으며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알았어. 그럴게.
노아:전처럼 저 없다고 길 잃으시면 안 돼요. (가볍게 웃어주곤 손을 흔들며 멀어진다)
시아록:...조심히 가. (너의 등 뒤로 저도 따라 작게 손을 흔들었다.)
...당신은 다시 편안한 숙소로 가 침대에 얼굴을 묻습니다.
이건 모두 아침부터 쉬지도 못하고 뛰어다닌 탓이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러고보면 이제는 모든 게 당신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지난 4년간,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모두 이 곳 지상 세계에서만 했잖아요.
병원도 약국도 레지스탕스 기지도, 단골 상점이나 아인 광장, 노아의 집. 안전 지대 안으로 뻗은 포장 도로까지.
모두 당신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슈슈가 모든 일의 구심점이라 몰랐는데 생각보다 당신의 '고향'은 훨씬 넓었던 거에요.
이런 세계가 침몰한다니, 당신은 어떡하면 좋을까요?
자책해야 하나요? 안도해야 하나요? 걱정해야 하나요?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혼란스러운 생각을 외면하려 짐에 손을 댑니다.
노아처럼 당신도 이삿짐을 싸야 하긴 하니까요. 바로 내일모레가 당신의 송별회잖아요?
생각이 잠잠해질 때까지 손에 짐이 닿고,
그렇게, 당신은 밤까지 잠들지 못합니다.
악몽 때문만이 아닌 다른 이유로.
―
마지막 열쇠
...그것도 모두 어젯밤의 얘기입니다.
어제는 모처럼 꿈도 꾸지 않고 푹 잤습니다.
노아가 시키는 대로 수면제를 먹은 덕분일까요.
개운한 몸을 일으키면 바깥에서부터 난잡한 소음이 잔뜩 흘러들어옵니다.
아침부터 TV에서 레지스탕스가 승전보를 가져오리란 속보가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거든요.
네, 드디어 오늘인 겁니다. 설원의 동굴로 출격하는 것이!
누군가는 단번에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니냐고 걱정했지만,
미뤄봤자 브리니클이 도망가거나 또다시 침투할 빌미만 주는 꼴이니
속전속결로 처리하자는 것이 레지스탕스에서 대두되던 의견이었습니다.
오늘은 딱히 아침에 할 건 없습니다.
조금 쉬다가 오후가 되면 비행선에 탑승하기만 하면 됩니다.
자, 무엇을 할까요?
시아록:(어제는 뭔가 순식간에 잠들고 일어났다. 눈뜨니까 아침인 기분이다. 어제의 그 고민들 모두를 어딘가에 치워놓은 것 같은 기분에 벌떡 일어나 씻고 준비해 기숙사를 나왔다. 자연스럽게 발이 병원으로 향했다.)
밥을 먹는 것보다도 병문안이 우선합니다.
정확히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발을 움직이고 보니 이곳, 슈슈의 병실에 있는 것에 가까운 거겠지만요.
콜드 슬립 기계 안에는 여전히 얼어붙어 평온한 슈슈가 존재합니다.
오늘따라 혈색이 좋아 보여요. 그 돌덩이들을 계속 해치우고 있기 때문이죠.
브리니클의 격파는 슈슈의 호전과도 연결되니, 앞으로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슈슈는 아직 자고 있어, 당신이 온 줄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도 수중 인류인 덕에 물속에서 답답하다거나 춥다고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원한다면 아침 인사를 건네도 좋습니다. 모처럼 좋은 날이잖아요.
시아록:(처음보다 훨씬 나아진 안색에 뭔가 일어날 때부터 이것저것 잘 풀려가는 거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쉽게 밝은 얼굴로 슈슈에게 인사를 건낼 수 있었다.)
안녕, 슈슈. 오늘은 아침부터 그냥 기분이 좋네. 뭔가 모든 게 다 되어가는 기분이라 그런가봐. 너도 오늘은 기분 좋을까? 그럼 좋겠다.
오늘은 이제 마지막으로 브리니클을 모두 없애러 가. 모든 브리니클이 없어졌을 그 순간에 네가 눈을 뜬다면.. 직접 못 보는 게 아쉬울 거 같지만, 난 전에도 말했듯이 내가 깨어있는 것만으로도 기쁠 거야. 먼저 일어나있으면 어서오라고 나중에 얘기해줄래?
브리니클과의 전쟁이 쉽게 끝날지는 모르겠습니다.
언제쯤 슈슈에게서 잘 자라는 인사가 아닌 새로이 맞는 아침 인사를 들을 수 있을지도.
하지만, 이마가 그리는 호선마저 외워버릴 만큼 마냥 그립고 익숙한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어쩐지 무엇이든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웃음이 지어집니다. 이렇게 차가운 포옹도 견딜 수 있는 당신이니
차가운 브리니클들과의 싸움도 결코 어렵지는 않을 거에요.
당신은 언제나 아쉬운 작별을 하고 레지스탕스 기지로 돌아옵니다.
숙소는 오늘도 평화롭습니다. 밝은 분위기도 한층 더 감돌고 있고요.
따로 할 게 없다면 침대에 다시 눕거나, 점심 배식을 기다리거나, 이삿짐을 미리 싸 둘까요.
시아록:(아침을 넘겼으니 점심을 먹으러 어슬러 식당으로 향했다. 맛있는 거 있으려나?)
오늘의 점심 메뉴는 치즈 그라탕과 아스파라거스 샐러드입니다.
아, 원하는 사람은 샐러드에 참치도 넣어먹을 수 있다네요.
후식은 방울토마토입니다. 보통 것과는 다르게 길쭉길쭉하게 생겼네요.
국물이 없는 건 아쉽지만, 급식치고 아주 제대로 된 요리가 나왔습니다.
당신은 시간도 모르고 너무 일찍 와 버렸고, 기어이 오늘 식당을 1등으로 밟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따끈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좋지만...
이 넓은 식당을 독차지하고 있는 기분이 이상합니다.
시아록:(이렇게 사람 없는 식당은 별로 경험한 적 없어서 이상한 기분이다. 늘 북적북적하던 곳이 한없이 조용하니, ... 이걸 대체 무슨 기분이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음식을 받은 식판을 들고 잠시 멍하니 탁자와 의자를 둘러보았다. 늘 넓다고 느끼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넓었나? 여기에 와서 너무 사람과 부대꼈나보다. 늘 사람이 적은 게 익숙했는데, 어느새... 사람이 없는 걸 어색하게 느끼다니.)
수중 마을은 적은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살았었죠. 아마 이 식당 안의 절반도 못 채울 겁니다.
시아록:(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상체를 세우고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길고 무거운 한숨이 입밖으로 터져나왔다. 아아.. 지독한 신음도 흘러나왔다.) 왜 자꾸 나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세상이 사실 나를 붙잡고, 멸망하면 안 된다고 애원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럴 거면 나를 붙잡고 외칠 게 아니라 유진이나 이오리, 노아에게 했어야지. 나는... 나한테 남길 것은 단 하나 밖에 없는데. 세상과 슈슈? 저울에 올려놓을 수도 없는 것을, 나에게 알려줘도 소용없어. 나는 훗날 이 선택들로 인한 죄악감이 나를 이루게 되더라도 상관없으니까.)
오늘은, 따라가지 말까.
(선택지는 이미 정해졌다.)
당신은 가장 오래된 과거부터 가장 날 것의 미래까지 모두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흔히 말하는 회귀자, 주인공, 그런 존재가 된 거죠.
당신이 이런 존재가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슈슈와 수중 인류를 구하기 위해 마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거대한 해류의 끝이자 시작에 몸을 던졌기 때문이죠.
새우의 내장이나, 복어의 가시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쓴맛이 입안을 덮고 온몸을 짓누릅니다.
...그래요, 슈슈.
슈테른의 증세... 아니, 이제는 우보 사틀라의 저주라고 부를까요.
아무튼 그것은 공교롭게도 브리니클이 다 부서져야만 차도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슈슈가 있는 곳은 지상 세계에요. 과거죠. 곧 멸망할.
...이제 아시겠나요. 슈슈를 구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브리니클을 다 파괴해야 합니다.
하지만 브리니클을 파괴하면 지상 인류는 멸망합니다.
그렇다고 치료법을 찾지도 못한 채 무작정 바닷속으로 돌아가면
슈슈를 집이 아니라 파도의 계단으로 보내게 될 겁니다.
...당신은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집니다.
지상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슈슈나 당신의 존재가 부정되거나, 나아가서는 마을 하나가 없어질 수도 있지만...
지상 인류가 멸망하게 둔다면, 그래서 슈슈의 치료법을 찾지 못하면 슈테른은 죽음을 맞습니다.
사실 인간이 되는 약은 해독제가 필요 없어요. 당신은 다시 바다에 완전히 뛰어들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건, 바닷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는 약이에요. 바다로 뛰어들기 직전에 삼키면 된답니다. 당신이 아니라, 당신 곁에 필요한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동봉합니다.
내 곁에, 필요한 사람……?
천천히 시선이 움직입니다.
눈이 마주칩니다. 같은 색의 눈동자와.
텅 빈 콜드 슬립 기계. 바닷속에서 숨을 쉴 수 있도록 돕는 약. 똑같은 얼굴.
뒤틀린 타임 패러독스.
핸드아웃: 도플갱어 패러독스
마을의 유일한 이방인. 어느 날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발견된 아이. 수중 인류라기엔 유난히 헤엄이 더디고, 비늘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 멸망한 지상의 흔적을 몇 번이고 매만지던. 지금의 노아는 슈테른과 조금도 다르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슈슈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슈슈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었습니다.
저 정말 깜짝 놀랐다고요... (한바탕 몰아치던 폭풍이 지나가고 새삼스럽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아록:응... 고마워, 노아. (그제야 너를 보고 제대로 웃었다.)
당신은 노아의 손을 잡고 선착장으로 향합니다.
오늘은, 다름아닌 브리니클들의 마지막 본거지를 파괴하기로 한 날이니까요.
그를 슈슈라고 불러도 좋을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어떻게 행복을 빌어주면 좋을지, 그런 건 모르겠어요.
그래도 우리는 함께였어요.
오래도록 둘이었습니다.
―
비행선 아틀란티카는 예정대로 설원의 동굴을 향해 날아갑니다.
인류의 평화를 가장하면서, 껍데기 안쪽에는 멸망을 품고 있는 알을 향해.
막 이륙하기 전, 선착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붐빕니다.
오늘만큼은 레지스탕스의 관련자 모두가 탑승하기로 한 날이거든요. 그야, 마지막 브리니클을 파괴하기로 한 날이잖아요.
그럼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시아록, 우보 사틀라를 송환하고 인류의 멸망을 막고 싶나요?
당신이 아직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더라도, 약속한 듯이 비행선은 이륙하여 도시의 머리 위를 날아갑니다.
발 밑에 곧 끝을 맺을 찬란한 인류 문명을 둔 기분은 어떤가요,
시아록:(북적한 선착장에서 비행선에 올라타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지. 시간은 자꾸 흘러만 가는데 아직도 결정을 못 내렸다.)
그들 모두의 존속이 오로지 당신의 손에 달려 있는 기분은요.
창 밖으로는 어느새 노을이 다 지고 밤이 덮인 하늘만 가득차 있습니다.
붉음에서 시작하여 노랑으로 끝나는 노을은 오래가지 못하고 밤의 어둠에 덮이고,
도시를 비추는 태양은 지평선, 아니 이제는 수평선 너머 물결에 잡아먹히고 맙니다.
오로지 어둠으로 덮여 몰락한 지구. 그럼에도 인간들이 곳곳에 밝힌 등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꼭 저주가 퍼졌을 때 슈테른과 함께 올라간 언덕 위에서 보았던 경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니, 어쩌면 조금도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사는 시간대가 다를지라도,
노아:시아록, 뭘 그렇게 보세요?
노아는 당신 옆에 있으니까요.
오늘은 요한이 운전을 맡는 날이라 괜찮다고 덧붙이면서요.
시아록:음, 그냥 생각을 좀... (풍경에서 눈을 떼고, 당신을 쳐다보았다. 세계가 멸망하는 걸 눈으로 보며 미래의 너를 기다릴 건지, 아니면 네가 행복한 미래를 바라야 할지. ...그런데 만약 우보 사틀라가 없어지지 않으면 그때처럼 또 모두가 아플 건지. 당신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에게 물어볼까? 모든 걸 다 얘기해야할지말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뭐라도 물어보면 답이 나올까? 밖을 보다 달을 올려다봤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창 밖에서, 항상 노아의 머리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보름달이 야속합니다.
저 차가운 별이 대체 뭐라고 지상을 멸망하여 파도에 삼켜지게 했으며, 노아의 꿈과 함께 방주를 침몰시키고,
종내에는 슈슈의 평화마저 빼앗아갔나요.
노아는 당신을 보더니 한동안 말이 없다가, 책을 덮고 천천히 일어섭니다.
노아:설원까지는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날아야 도착해요.
우리가 날아갈 곳은 남극이라는 곳인데 말 그대로 지구의 남쪽 끝이에요. 극지대가 왜 극지대냐면, 아마 지구의 끝과 끝점에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브리니클은 다들 남극 출신이라 그렇게 차가웠던 걸까요?
시아록:노아, 하나만 물어봐도 돼? (당신의 말을 가만히 듣는 거 같다가 대화의 흐름과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노아:그곳은... 네? (안 듣고 계셨던 건가. 머쓱해져서 목덜미를 긁적인다)
시아록:브리니클이 다 없어져지면 행복할 거 같아? 좋을 거 같아?
노아:브리니클이 다 없어지면 인류는 마침내 평화로워지겠죠. 그리고... (창가에 팔을 대고 엎드린다) ... 이전에는 못 해본 일들을 잔뜩 할 수 있을 거에요. 당신도 고향으로 돌아갈 거고. 음...
...어떤 마음이실지는 이해해요. 입은 바싹바싹 마르고, 깊은 바다에 빠진 듯이 무섭고, 당장이라도 배에서 뛰어내려서라도 상대방한테 달려가서... 눈을 떠서 날 보게 하고 싶죠?
그러니까 정신 차리셔야 해요. 여기서 제대로 브리니클을 격파하고 가야 슈테른 씨도 깨어나고, ...그래야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잖아요.
슈테른 씨를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최선의 일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거니까. ...제가 그 분이었다면, 시아록이 이 작전에서 절 걱정하다가 다쳐오는 건 조금도 바라지 않을 거에요.
시아록:그런 게 아니었는데.. (인상을 찡그리고 작게 웃어버렸다.) 내 질문은 내 행복이 아니라 네 행복에 대해서 물은 거였는데, 내 걸 말하면 어떡해.
노아:시아록이 이 작전에 제대로 집중 못 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죠. 그래도 집중하셔야지 어떡해요.
시아록:나는 딱히 중요하지 않은데. 네 걸 얘기해줘. 그거면 되니까.
노아:...제 행복이라니 답하기 어려운 질문만 골라서 하시네요. 그래도 지금까지 어려운 일을 하는 건... 제 전문이었으니까.
아뇨, 중요해요. 시아록은 수중 인류지만 저랑 친구이기도 하고, 이제 우리들과 추억을 공유하거나 같은 것을 보지 못하더라도 어딘가에서 행복하길 바라니까.
그야 당신은... (뒷말은 고개를 완전히 묻으며 삼킨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흰 얼굴을 가리는 모습은 달을 가리는 지구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다)
시아록:나?
(당신이 말을 하다 말아버리자 고개를 기울였다.)
노아:...음, 맞아요. 제 행복은 당신이 슈테른 씨랑 무사히 바다로 돌아가는 걸 보고, 저도 저만의 여행을 시작하는 거거든요. 다시 돌아올 엄두가 안 날 만큼 멀리까지 가서, 세상도 절 잊고 저도 세상을 잊을 때까지.
그런 것 같네요, 음. (말을 마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다시 소파로 향한다)
시아록:세상이 널 잊고, 너도 세상을 잊고...? 왜 그러고 싶은 거야?
(생각해보니 전에도 들은 거 같은데 이유를 되묻지 않았던 거 같다. 여행에만 정신이 팔려서)
노아:잊으면 행복해질 것 같아서요. 빈 자리를 망각으로 채우겠다니, 어리석죠.
하지만 전 원래 그랬으니까요. 옛날에도, 지금도. (아까처럼 똑바로 앉지 않고 팔걸이 쪽에 엉덩이를 받친다)
시아록:지금까지의 일 전부?
노아:... 아뇨,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게 절 구성하는 것들인데.
이오리 씨도, 호버 씨도, 오필리아 씨도, 엘나스 씨도... 그리고 대장이나, 당신도.
추억하는 건 멈추지 않을 거에요. 그래도 다른 것으로 절 채우다 보면 괜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막연하게나마 들어요.
시아록:그럼 기억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면.. 싫겠지? (바닷속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던 너를 떠올렸다. 토대없이 하나씩 쌓아간 기억들이 정말 제대로 기둥이 되었을까? 지금의 네가 몇 번이고 곱씹었을 추억이 사라지는 게 정말 좋은 걸까?)
노아:잊고 싶다곤 했지만 지우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파도에 부딪혀 서서히 부서지는 것과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건 다르니까요.
노아:오늘따라 제 행복을 엄청 궁금해하시네요...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쑥쓰러움과 떨떠름함 사이 어딘가. 괜히 책만 만지작거리다 입을 연다) 제 행복은 신경쓰지 마세요. 그럼 저도 행복할 거에요.
노아는 무어라 더 입을 우물거리다가, 곧 한숨과 함께 말없이 털어버리곤 일어섭니다.
노아:전 피곤해서 먼저 가 볼게요. 이따 요한 씨랑 교대도 해야 하고...
시아록:응, 조심히 가. 좀 푹 자.
노아:그럼 내일 또 봐요. (복잡한 표정으로 웃어주며 손을 흔들고 방을 나선다)
시아록:(그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나면 좋겠는데. 방을 떠난 당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자리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정말 쉬운 건 하나도 없구나. 나한테 주어진 선택이란 게 너무 큰 거 아니야?) 네가 아프지만 않는다면, 나는 다 괜찮아.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미래에 내가 없어도 괜찮아. 나한텐 세계보다 네가 더 중요해. 나보다도 네가 더 중요해. (홀로 작게 중얼거렸다. 무릎 아래에서 말들이 맴돌았다. 너는 내게 끝내 답을 내놓지 않았다. 네가 한마디만 해줬어도 나는 답지 고르는게 정말 쉬웠을 텐데.) 하...
세계를 구하느냐 마느냐는 이제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브리니클과 우보 사틀라는 인류를 필시 멸망으로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멸망할 원인이 우보 사틀라에게만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세계가 위기를 피해간다고 해도 언젠가 수중 세계는 생겨나고 말 것이라는 걸,
이제 몇 번이고 세계를 건너고 시간을 건넌 당신은 어렴풋이나마 알아챕니다.
그 수중 세계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는 있겠지만요.
당신이 아는 "슈슈"는 없겠지만요.
그렇기에 세계를 구하는 것은 곧 그를 구하는 것과 뜻이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세계는 그니까요.
아주 옛날부터, 줄곧 그랬으니까.
이 이야기의 비극은 그의 세계가 당신이 아닌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넉넉한 소파에서 공허감이 잔뜩 묻어납니다.
주인을 잃고 테이블에 홀로 버려진 책은 바람에 날려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당신은 그저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 것 뿐이었는데.
"어제"와는 달리 졸음은 쉬이 찾아오질 않고, 어느 곳에 몸을 눕히기에도 비행선 안은 너무 춥습니다.
겨울이니까요. 꽃이 지고 새들이 짝을 잃으며 나무가 열매와 잎을 떨구는 계절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침대로 찾아가 눕습니다. 이제 빨리 자야 한다고 잔소리해줄 사람은 없어졌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
그렇게 몇 시간을 뜬눈으로 지새웠던가요?
정신차리고 보면 아침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일어났더니 작은 창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거든요!
컨디션이 그닥 좋진 않네요. 아무래도 잠을 설쳤으니까요.
그래도 약속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로비에 나가면 오필리아 씨와 그리드 씨 등등...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모여 있습니다.
당신을 보고는 아는 체를 하네요.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 중에는 전에 동굴 탐사를 함께했던 대원도 있습니다.
유진:(턱을 손에 대고 주변을 올빼미처럼 이리저리 주시하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돌아본다.) 누구... 아, 시아록 대원.
시아록:할 말이 있는데 괜찮아요?
유진: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미리 들어가 계ㅅ...
무슨 말이지? (잠자코 멈춰서서 그 말을 경청한다.)
시아록:그게...(말하려고 하는 지금조차 고민에 들어섰다. 그러나... 나는, 만에 하나 '그것'때문에 네가 또 아플 확률을 두고 볼 수 없다.) ...석판에서 봤는데요. (시간을 돌아온 걸 말할 수는 없어서 얼버무리며 작게 한숨을 들이켰다.) 브리니클을 모두 처리하면 신이 소환되어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적혀있었어요. (그걸 신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유진:...석판? 어느 석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번 탐사에서 새로 얻은 석판에서 해독한 내용인가? 그런 중요한 내용이 있었다면 내게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두 눈이 거세게 떨리는 걸 보면, 이 이야기를 믿지 않는 눈치는 아니다)
...어떤 신, 입니까? 저희가 어떻게 대비하면.
시아록:(결국 크게 한숨 쉬고 말았다.) 대비할 수 있는 건... 마법 밖에 없어요. 사람도 엄청 필요하고요.(지금의 당신들은 할 수 없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근데 실패하면 전부 다 죽을 거예요. 우리 뿐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들이요. 그래도 브리니클 전부를 없애고 '그 신'을 불러 낼 거예요?
유진:(몇 분이 흘렀을까? 브리니클 수십 마리보다도 무거운 결심의 말을 던진다.) 브리니클을 완전히 멸하지 못하면 더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저희는 조금이라도 더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이곳에 있으니까요.
그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무엇이든 할 거다. 가만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레지스탕스 전원에게 예의가 아니니까.
말씀해주십시오. 레지스탕스가 그 신을 막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무릎을 딛으며 앉는다. 꼭 비는 것처럼)
시아록:(당신도 참 한결같은 사람이어서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의 앞에 저도 느리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마 많은 사람이 필요할 거예요. 제 마력으로 마법을 써봤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마력이 필요해요. 이건 신 송환 주문이에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려보내는 거죠. ...진짜 실패하면 그 누구도 남지 않고 다 죽어버릴 거예요. (내가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브리니클을 모두 해치우기 전에 갑판에 모두 모여있도록 하죠. 브리니클이 전부 사라지면, 저 달에서 우보 사틀라, 그 신이 나올 거예요. 그때 제가 돌려보내볼게요.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반반이에요. 아시죠? (슬쩍 미소지으며 당신의 눈을 바로 쳐다봤다.)
유진:...그 마력이라는 걸 저희도 가지고 있습니까? 몇 사람이면 충분하겠습니까. 그거면 됩니다. (이제 더는 뒷걸음칠 수 없다는 듯 굳은 눈으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다)
시아록:있긴 해요. (슈슈도 마법을 배워 썼으니..) 되도록 많으면 좋죠. 위치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 말고는 다 갑판에 올라갔으면 좋겠어요. (마력 부족이면 모두가 죽는다.)
유진:알겠습니다. 가능한 많은 인력을 당신의 마법에 동원할 테니...
부디 우리의 미래를, 함께 구원해 주십시오.
유진은 그 말을 끝으로 당장 선박으로 내려가 무언가 지시하기 시작합니다.
밖으로 나오면 모두가 비행선의 대포 부분만을 주시하고 있고, 담당 대원들은 바쁘게 발포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어제와 같이 비행선은 창공의 어느 지점에 정박하고,
그 대포의 총구를 모두 동굴 쪽으로 겨눕니다.
이 한 발로, 마지막 결전이 맺힙니다.
당신의 요청대로 대포를 조종하는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갑판에 서 있습니다.
개중에서는 노아도 함께합니다. 모두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엄청난 바람과 싸라기눈. 마지막 발포를 준비하는 사람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나요.
시아록:(아래를 보기보다 그저 하얗게 입김이 올라가는 걸 그대로 따라 시선이 올라가며 달을 찾았다. 입김에 증기에 감춰 한숨을 쉬었다.)
옷깃에 묻어두었던 펜던트, 고대종의 수정을 꺼냅니다. 심해의 조각을 극풍설한의 온도로 얼린 펜던트는 당신의 손에 꼭 맞게 쥐어집니다.
달이 차올라 초승달에서 보름달이 되듯이 완성된 마법은, 그를 다시는 찾아올 수 없을 만큼 머나먼 곳으로 떠나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당신에게서 말미암아, 마침내 모두의 손으로 완성한 기적입니다.
우보 사틀라의 무수한 위족들이 꿈틀거리며 휘둘러지지만, 아틀란티카를 맞추는 일은 없습니다.
유진 크시슈토프가 선언합니다!
유진:더 이상의 희생은 없다.
우보 사틀라여, 다시는 깨어나지 말아라!
갈라졌던 달이 달라붙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달의 뒷면, 우보 사틀라가 사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아, 마침내 지상에서 거대한 신이 사라집니다.
끝났다, 는 실감도 없이 멍하니 있으면 한 박자 늦게 환호가 울립니다.
레지스탕스 전원이 감격하고 있습니다. 와앙 소리 내 울기도 하고요.
"이제 모두 무사할 거에요!" 노아는 신이 나 당신을 끌어안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눈가를 가볍게 훔친 유진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유진:비행선 아틀란티카, 귀환!
...
...
―
노아의 말이 맞아요.
그 후부터는 모든 게 무탈히, 잘 돌아갔습니다.
브리니클과 우보 사틀라가 인류의 손에 남김없이 사라지자 도시는 빠르게 재건되었습니다.
매일같이 부서진 건물을 보수하는 소리가 들려와 노아는 잠을 설쳤지 뭐예요.
앞으로 평화가 이어진다면, 언젠가 유리도 깨어나게 될 날이 올까요?
병원으로 향하는 유진은 평소보다 온화해 보였습니다.
오늘은 도시에서 대대적으로 축제가 열리는 날입니다.
브리니클을 모두 격퇴하고 우보 사틀라의 마수로부터 도시를,
세계를 지켜낸 자들을 위한 연회죠.
하지만 당신은 그 거대한 행복으로부터 조금 빗겨난 채입니다.
어째서일까요? 당신이 지상 인류가 아니라서?
그것도 아니면...
노아:...시아록.
시아록:...응? (한 박자 늦게 당신의 말에 대답했다.)
당신과 노아는 연회장에 가는 길을 벗어나 사해를 걷고 있습니다.
그리운 바다, 옥색 물과 상아빛 모래...
아니, 어떤 모습이더라도 언제까지고 당신의 고향일 바다.
노아는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묻습니다.
노아:...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 진심이에요?
그렇게 묻는 노아는 조금 수척해 보입니다.
분명 기쁜 표정일 줄 알았는데, 왜 저런 얼굴일까요.
역시 잠을 설쳐서?
시아록:응? 당연하지. 왜? (당연한 대답을 하고, 흐린 당신의 얼굴이 더 신경쓰이는 듯 자세히 쳐다본다.)
피곤해?
노아:... 당신이라면 다르게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아록:응..? 뭐가?
노아:역시 상냥하시네요. (고개를 숙였다가 바닷가의 경치로 얼굴을 돌린다.)
피곤한 건 아니에요. 아직 쌩쌩한 걸요. (힘 없는 목소리로 내뱉으며)
시아록:그럼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노아:...아뇨,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아요.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슈테른 씨는 어때요? 깨어나셨어요? 유리 씨는 아직이래요.
시아록:어디가 아픈데? (급하게 물었다가 슈슈의 이야기에 조금 웃고 말았다. 말해도 될까?)
있잖아. 좀 엉뚱한 얘기해도 돼? 그냥 동화같은 건데. 좀 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많이 생략해볼게. ...지금보다 먼 미래에 어느 곳에, 엄청 친한 두 사람이 있었어. 마을은 작았지만, 사람들이 서로서로 도우며 사는 평화로운 곳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아프기 시작하더니 곧 죽음에 이르는 거야. 그걸 두 사람이 해결하려고 하다보니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왔어. 그런데 두사람 중 한 명도 똑같이 아프기 시작했어. 그래도 어떻게든 그 병을 고칠 방법을 알아내서 해결하던 중에.. 정말 놀랍게도 과거에서 친하게 지내게 된 사람과, 미래에서 같이 과거까지 거슬러온 아픈 친구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대. 그리고 병을 고치려면 과거도 다 바꿔야 한다는 걸 알았어. 또 그것만이 아니라 과거를 바꾸면 자기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았어. 뭐, 이건 반반이지만. 그럼 그 사람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아? (너무 대놓고 정신없게 얘기하나 싶으면서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이제는 알아줘, 알아줘. 하고 바라고 있었으니까.)
노아:(멈춰서서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는다. 분명 5분도 되지 않을 찰나마저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지만 않았다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도 보일 것이다. 손에는 전에 산 카메라를 들고 있다. 언젠가 바닷속으로 잠기고 말 테지만, 당신이 지켜준 덕에 두 손에서 떠나가지 않은, 이번에야말로 추억을 담을 상자.)
(아니,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그저 멈춰선 걸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돌아보는 얼굴은 셀 수 없이 많은 감정으로 뒤틀려 있다) ...시아록.
지, 지금 무슨 얘기를... 저, 저는. (눈을 꽉 감고 고개를 젓더니 손을 꽉 잡아온다.)
시아록:(무수한 감정을 담은 복잡한 네 얼굴을 보다가 어쩔수 없다는 듯 웃음이 났다. 알아달라는 마음을 담았지만, 네가 이걸로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게, 무슨 얘기였을까.
노아:아니, 잠깐만, 잠깐만요. 과거... 라니요? (아픈 표정으로 웃지도 않고 서 있다가, 이내 두 손을 잡아온 뒤 쏟아내기 시작한다) 미래에서 왔다고요? 거짓말.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선명한데...
아니라고, 해 주세요... (손에 힘이 풀려 잡고 있던 손을 놓친다. 푹, 모래에 사진기가 떨어져 파묻히는 소리는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와 같았다 다른 시간대라면 이제 당신은 돌아가야 하잖아요.)
...사라지지 않았죠? 사라지지 않을 거죠? (무리한 부탁임을 알면서도 내뱉는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만이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이제 같은 시대에서 살 수도 없다니. 울고 싶은데 그 사람 앞이라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돌아갈 거에요? 그 사람은? 슈테른 씨는...? (풀 수 없는 난제를 마주한 수학자같은 눈을 하고 있다.)
시아록:그러게.. 돌아가지 말까? (사진기를 떨어뜨린 당신의 손을 한 손으로 잡고, 날리는 네 머리카락을 다른 손으로 잡았다.) 그냥 여기 있을까?
하하, 너도 알잖아. 네가 슈슈야. (돌려돌려 말하던 것을 결국 내뱉었다.) 내가 너무 많이 바꿔버려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 미래도 돌아가도 내가 있을 자리가 있을까, 네가 있을까. 조금 무섭기도 해. (바람결에 날아가버려서 네가 듣지 못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목소리가 한참 작았다.)
노아:아뇨, (직설적인 말에 창으로 관통당한 사람마냥 잠시 비틀거린다.) 아뇨, 전 그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이 함께 유년기를 보내 온 가장 소중한 소꿉친구잖아요. 저랑 슈테른 씨가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그 공백은 메울 수 없어요. (알고 있었는데, 만약 이 사람이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이 곳에 있어준다 해도 당신이 행복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포기한 건데... 바람이 차서일까? 눈에서 결국 눈물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 날의 당신처럼 차마 마음 속에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와 모래 위를 적신다)
차라리... 말하지 말지 그랬어요. 그럼 다 잊고 보내줄 수 있었는데, 왜 그랬어요...(결국 무너지는 얼굴을 두 손에 묻는다. "곁"에 있어주겠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사무치도록 외로운지 모르겠다)
왜 사라질 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했어요? 제가 행복하려면 당신이 행복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왜 존재를 걸고서 그런 짓을 했어요. 혹시나 바꾼 과거 때문에 당신이 사라진다면... 돌아갈 곳이 없어진다면 당신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잖아요. 그게 얼마나 비통한 일인지 당신은 알아요? (한숨을 쉬며 힘이 빠진 듯 주저앉는다)
시아록:너에게 내 어린 시절이 없어도, 바다에서 같이 지내던 기억이 없어도.. 그렇다고 네가 아닌 게 아니야. 나한테는 그래. (작은 목소리가 조근조근 읊었다.) 네 말대로 말하지 말 걸 그랬나? 그래도... 네가 나를 알아주길 바랐어. 네가... 나를.
(주저 앉는 당신에게 놀라 움찔 몸을 떨다 한 발 늦어 당신을 붙잡지 못했다. 그 대신 당신의 앞에 쪼그려앉으며 당신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왜 안 행복해? 네가 살아있고, 후에 행복해진다면 그게 내 행복이야. 내가 미래에 있던 없던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내가 그랬잖아. 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건 나에게 하는 말들과 생각이었어. 노아가 곧장 부정해줬지만.
그러니까 그건 슬픈 일이 아니야. 전혀.
노아:... (행복하다는 말을 듣고서도 한동안 멍하게 앉아서 눈물만 흘린다. 온 세상의 슬픔을 다 떠안은 듯한 얼굴) 제가 있는 게 당신에겐 행복이에요? 하지만 전 수중 세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요. 추억도 공유할 수 없고요. 전... 전 바보라서 지금 와서 제가 그 사람이라느니 제가 당신의 행복이라느니 그런 건 모르겠어요.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울컥, 하고 무언가 치솟는 채로 겨우 눈물 범벅이 된 손으로 어깨를 더듬더니 껴안아버렸다)
시아록:(네게 안기니 왜인지 눈물이 났다. 너를 끌어안고 네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노아:왜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았어요? 난 이미 당신을 떠나보내고, 그 사람과 행복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차라리 그때 얘기해줬다면 이러는 게 아니라 좀 더 기뻐해줬을지도 모르는데.
(터져나오는 울음에 자꾸 말문이 막힌다. 답답한 것도 같고 가슴이 아픈 것도 같다)
...하나만 물을게요. (어느새 어깨에서 얼굴을 떼며 잔뜩 일렁거리는 목소리로) 그럼 당신은 이제 어떡할 거에요?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어요?
시아록:나도 안지 얼마 안 되서 그래.. (여전히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당신과 마주보았다.) 너만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필요없어. 내가 왜 자꾸 네 행복을 지금껏 물었겠어. 세상도 너와 바꿀 수 없어. 세상이 다 무슨 소용이야, 네가 없으면. ....그러니까, 네가 원하면 나는 남을 거야. 우보 사틀라도 없으니까 미래는 다 괜찮을 거야. (여기 남는다고 자신이 괜찮을지 알 수는 없지만, 미래로 돌아가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가 없을 지도 모르는 미래보다는 네가 있는 과거가 낫지 않을까.)
노아:...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포기할 수가 없잖아요... (작은 틈마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금 품으로 파고들어 끌어안는다.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새끼가 어미에게 매달리듯 맹목적인 움직임) 전 당신만 행복하다면 뭐든 됐어요. 저한테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정말 제가 행복하면 뭐든 됐다고 하면... 저는... 곁에 있어달라고 할 거에요...
...그래도 정말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두고 온 게 있잖아요, 당신이 있을 곳은 거기잖아요... (그 말을 뱉자마자 다시 눈물이 치솟아오르는 듯 한동안 흐느낀다)
시아록:(그저 네가 매달려오듯 안기는 게 좋아서 마주 끌어안았다. 눈물은 여전히 뚝뚝 떨어졌다. 네가 자신을 포기할 수 없다고, 곁에 있어달라고 해서 그게 너무 기뻐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 건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네 옆에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전부 괜찮아. 그러니까... 옆에 있어줘, 노아.
노아는 그 말에 더욱 크게 울음을 터트립니다. 당신은 가슴이 아프고도 행복해서, 그저 더 힘을 줘서 노아를 끌어안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떨어지는 눈물은 슬픔으로 시작해 안도감을 섞어 흘러내립니다.
다시 몸을 추스르고, 사진기를 주워들고 나면 어느덧 다시 노을이 집니다.
겨울은 해가 금방금방 지니까요. 벌써 저녁을 준비할 때가 온 거겠죠.
비행선에서는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게 될 하늘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금 되찾으니 반가우면서도, 어딘가 먼 곳에 있는 게 그리워집니다.
당신이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한 아주 머나먼 시간대가.
노아는 말없이 손만 잡고 걷다가 꼭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중얼거립니다.
노아:예전에, 당신을 좋아한 적이 있었어요.
당신은 알았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당신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 있었고, 그걸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런데도 당신을 좋아하게 되는 것보다 당신이 저를 잊는 게 더 무서워서... 그래서 구태여 자주 붙어다녔어요.
당신이 저와 슈테른 씨를 구분한다는 건, 저를 오롯이 저로서 기억해준다는 소리였지만, 동시에 저는 죽어도 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더없이 기쁜데도 어쩐지 속이 아팠어요.
그래서 솔직히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해요.
여행은... 전에 말한 대로에요. 아무리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더라도 당신을 잊고 추억 한켠에 남기면 조금 나아질까 생각해서...
...미련하죠? 저.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지 모르겠다며 헛웃음을 흘린다.)
시아록:그게 왜 미련해?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안 쉬운데, 하물며... 서로 좋아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잖아. 그런 건 미련하다고 하는 거 아니야. (잡고 있던 당신의 손을 슬쩍 풀었다가 깍지껴 잡았다.)
노아랑 슈슈는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지금랑 미래에서 서로 다른 기억으로 쌓아올린 게 노아는 서운할지도 모르니까 나중에 전부 얘기해줄게.
노아:가, 갑자기 깍지는 왜... (입술을 꽉 물고 그야말로 석양처럼 익은 얼굴을 휙 돌린다. 일단 풀지 말라는 듯 손에 힘을 주고 있으니까 절대 기분이 나쁜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조, 좋아했던 상대한테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이상하다고요.
(곁눈질로 당신의 옆얼굴을 훔쳐보다가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뜬다) ...아, 그, 그렇구나. 그래도 괜찮아요?
가, 감, 감사합니다. 그럼 저도 잘 듣고 기억에 새길게요. 드, 듣는 것뿐이고 직접 겪은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안절부절못하는 눈치로 손을 잡았다 뗐다가 아주 난리도 아니다)
...이제 떠나지 않는 거죠? 곁에 있어주시는 거죠, 정말로.
시아록:응, 그냥 기억하고만 있어도 돼. (네가 안절부절하는 반응에 작게 웃으며 손을 꽉 잡았다.)
응, 안 떠나. 여기 있을 거야. 계속.
노아:(당신의 확답에 조금 복잡하고 아픈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활짝 핀 미소를 보여준다) ...네, 그거면 됐어요.
그럼 이만 도시로 돌아갈까요? 우리도 축제의 주인공인데, 마저 즐겨야죠.
시아록:그래, 그리고 나중에 다시 짐 집으로 옮길 거지? 아니면 같이 그대로 여행 가? (당신의 손을 잡고 도시로 돌아가면서 물었다.)
노아:아...! (생각 못 했다는 얼굴로) 그, 그건... 여기 남으실지 바다로 돌아가실지만 생각하느라...
전 어디에 있어도 괜찮지만... 당신만 괜찮다면, 가, 같이 이곳저곳을 가 보고 싶어요. 세상에는 안 보면 손해일 만큼 아름다운 광경도 여행지도 많이 있으니까.
무, 물론 이 도시도 사랑하는 고향이고, 좋지만... 바다를 포기하게 되었다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시아록:그럼 좋아, 여기저기 여행다녀보자. 나중에 여기로 다시 돌아오면 되니까.
노아:...네. (따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오늘이 이 도시에서의 마지막 축제겠네요. 어서 가요. 이따 저녁에 행진 같은 것도 한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노아가 당신을 끌어당깁니다.
덥석, 잡는 손은 따뜻합니다.
저주도 추위도 얼음도 없어요.
노아:...그나저나 전 그럼 정말 미래의 또 다른 저... 제 도플갱어 같은 걸 만난 셈이네요. (척척 앞장서 걸어가면서 얘기한다)
도플갱어끼리 만나면 죽는다던데... (스스로 뱉고도 조금 안 좋은 표정이 된다)
넌 안 죽어, 라고 답하면 웃습니다.
뭐, 엄연히 말해 그 ‘미래’는 사라졌죠.
수중 세계는 여전하겠지만(어쩐지 그런 확신이 듭니다.)
마을에 ‘슈테른’은 없을 거예요.
당신은 혼자 바다 위로 올라왔다, 저주도 죽음도 없었다……
그런 기억이 당신에게도 작게 생겨났거든요.
다른 기억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작게요.
당신은 노아가 이끄는 대로 사람들이 기다리는 연회장으로 달려갑니다.
발을 바쁘게 움직이면 숨이 찹니다.
바싹 마른 공기가 당신의 폐를 부풀립니다.
아직 지상의 중력은 무겁고, 건조한 공기는 비늘을 딱딱하게 만들어요.
정든 바다를 떠나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게, 살던 곳에서 벗어나 정처 없는 여행을 시작하는 게
장장 3부에 걸친 대서사시가 끝났습니다... 언제 읽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인간찬가적 스토리와, 언제 읽어도 마음이 일렁이는 갓 롤플의 조화... 정말 좋아하는 캠페인을 정말 좋아하는 아이와 다녀올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상황과 서로의 감정을 마구 꼬아놓은 탓에, 엔딩을 앞두고선 제발 해피엔딩 보게 해 달라고 앤오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던 기억이 있네요 ^_^; 세션 중 로그뺨도 쳐 보고... 여러모로 인상깊은 탁이었습니다. 하... 좋았다...... 얘들아 평화로운 세계에서 행복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