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록:(오래되었다 말고는.. 딱히 알 수 있는 건 없네. 누가 하나는 죽었을까? 단단하게 굳은 피처럼 딱딱해진 얼굴로 다음으로 싸움의 흔적을 눈으로 쫓았다. 죄다 깨벼저린 유리병과 책상을.)
특별할 것 없는 파편들만 있습니다.
부서진 모양새에서 격정이 묻어나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한 쪽 벽에 발톱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괴물의 것임이 분명합니다.
아, 지긋지긋한 괴물.
그 익숙한 형태를 더듬다 보면,
당신은 문득 괴물에 대한 것을 상기합니다.
분명 익히 들었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여태껏 잊고 있었던.
핸드아웃: 괴물
세상이 검은 바다에 잠긴 뒤 생겨나기 시작한 이 괴물은, 원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또 다른 인간을 공격하고 잡아먹으며, 괴물에게 ‘물리면’ 그 사람도 괴물이 됩니다. 감염 속도는 빠르면 30분, 느려도 2시간 남짓입니다. 감염은 단계가 있다는 게 기정사실이지만, 아직 연구가 부족해 미지의 영역입니다.
창백해진 피부 위에는 시퍼런 핏줄이 흉하게 올라 있으나 피는 인간과 동일한 붉은색이며, 온몸까지는 아니지만 딱딱한 비늘이 다닥다닥 돋아 있습니다.
흰자위가 파랗고, 무기인 손톱은 시멘트 벽에 상처를 낼 정도로 단단합니다. 힘이 세며 발이 물갈퀴처럼 변해 있습니다. 개체에 따라 아가미나 지느러미를 달고 있기도 합니다. 기괴한 울음소리를 냅니다만 괴물끼리 소통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큰 소리를 내면 몰려들기는 합니다. 검은 바다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주 깊은 곳에 머물기 때문에 바다에서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시아록:(질린 표정으로 할퀴어진 자국을 보다가 이내 마른 손으로 쓸어내리고는 당신을 불렀다.)
슈슈, 찾은 거 있어? 없으면 빨리 이 방에서 나갈까? 계속 있어봤자 좋은 기분도 안 들 거 같아.
슈테른:...이걸 찾았어요. (총알 하나를 주워든다.)
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우선 제가 갖고 있을게요.
볼일도 끝났으면 이만 나갈까요? 계속 있으면... 피 냄새 때문에 어지러울 테니까.
시아록:잘 찾았네. 응, 얼른 나가자.
(당신의 손을 잡고 재촉하듯 흔들며 문 밖으로 나왔다.)
다시 복도를 지납니다, 창문 너머로 잠긴 빌딩의 벽을 타고 파도가 혀를 날름거리는 게 보입니다.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처음 파도가 세상을 집어삼켰던 날이 떠오릅니다.
아직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 날은 날씨가 유독 맑았거든요.
우리는 그날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죠.
기념일도, 휴일도 아닌 평범한 일상.
하지만 슈슈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날은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의미로도 특별한 날이었죠. 검은 파도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거든요.
두 사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당신이 슈슈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지…
언제는 바닥이 온통 젖어서 슈슈의 몸을 당신이 이불처럼 덮고 바들바들 떨면서 잠든 적도 있었습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면, 어느새 노을이 다 져 갑니다.
해가 검은 파도를 핏빛으로 물들이며 집어삼켜집니다.
계단이 부서져있다니 이 층에서 바로 뛰어들어야겠지만...
다행인지 바다까지의 높이는 2~3층 남짓입니다.
뛰어든다고 아주 위험하진 않겠죠.
그렇게 가방을 챙겨들고 채비를 마치려는데, 뒤에서 슈테른이 부릅니다.
슈테른:저, 시아록.
시아록:응?
슈테른:오늘은... 괴물을 만나도 최대한 전투는 피하는 게 어때요?
혹시 싸우게 되더라도, 발 정도만 다치게 해 두고...
제가, 그, 몸이 조금 안 좋아서...
시아록:그럴까? 그래.
(이런 상황에서 몸을 사리는 게 나쁜 것도 아닌걸. 오늘은 아마 저도 그리 좋은 컨디션은 아닐 테다.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말에 동의를 표했다.)
시아록:(앞선 서랍과는 달리 쓰지 못하는 잡동사니만 넣어둔 서랍에서 수첩이 나오자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수첩을 주워들고 펼쳤다.)
내용은 누군가의 일지인 모양입니다. 낡지는 않았네요.
핸드아웃: 누군가의 일지
검은 해일이 몰려온다 했더니 눈을 뜬 곳이 이곳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세상은 다 물에 잠겼고 당연히 휴대폰도 되지 않는다. 리안은, 비산은……. 제발 무사하길.
괴물에 의해 사람이 죽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물어뜯긴 사람이 괴물로 변한 것도. 그들이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 게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도울 수 있었을까? 아니, 내가 도왔어도 어쩌면 그들은…….
가족과 꽃밭으로 소풍 가는 꿈을 꿨다. (이 부분엔 눈물 자국이 묻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죽게 되면 가족을 볼 수 있을까? 아니야. 너희는 살아 있을 테니 나도 힘을 내야지. 신이시여 제발…….
천운으로 안전한 장소를 찾은 듯하다. 만반의 준비도 끝냈고, 가구도 전부 옮겨놓았다. 간만에 침대에 누으니, 잊은 줄 알았던 눈물이 밀려나왔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편안하지 않고 오히려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참 우습다. 위험할 땐 살기만 하면 다 좋을 것 같았는데, 이런 배부른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차라리, ■곳■■ 길잡■■ 해볼■ ■다. ……전■■ ■■ ■했■니. 일단 식량 문제는 없고 여긴 꽤 안전하니까.
시아록:(글자가 겹쳐쓴 건지 아니면 지워버린 건지 알 수 없는 일지를 훑었다. 이것도 그냥 버리고 싶었던 걸까.. 잡동사니 속 수첩의 신세가 어쩐지 슬프게 느껴졌다. 일지도 제자리에 넣고 닫았다.)
(괜스레 손으로 책상 위를 한 번 쓸어보고는 테이블을 확인하러 다가갔다.)
침대 맡에 둘 법한 작은 테이블입니다.
물에 꽤 오래 잠겨 있던 물건인 모양인지,
흰 테이블의 다리 언저리가 검게 물들어 있습니다.
딱히 올려져있는 건 없지만... 그렇기에 무언가 올려둘 수 있겠죠.
시아록:깨끗하게 관리되어 있네..
(살펴볼 게 없는 테이블에서 소파로 시선이 옮겨갔다. 슈슈와 둘이서 편하게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소파.)
(소파에 다가가서 한 번 앉아보고는 슈슈를 부르기 위해 쳐다보았다.)
한 사람 정도라면 구겨져서 잘 수 있을 법한 크기의 소파입니다.
나름대로 푹신하지만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런데, 앉아보니 무언가 딱딱한 감촉이 느껴지네요.
마치, 쿠션 아래에 무언가 있는 듯한...
시아록:뭐지? (일어나 쿠션을 들어올렸다.)
아니나다를까, 아래에 숨겨져 있던 비상 식량이 있습니다.
통조림 2개와 생수 1개네요.
(통조림: HP+1, 생수: 이성+1.)
식량을 주워들고 슈슈 쪽을 바라보면, 그도 손에 무언가 들고 있습니다.
시아록:슈슈, 이거 봐. 식량이야.
(사냥에 성공해온 동물마냥 기분 좋게 당신에게 손에 쥔 걸 보여준다.)
한껏 의기양양한 당신과 다르게, 슈슈는 그저 맥없이 돌아봅니다.
슈테른:여기에도 식량이 있었다니. 내일 아침은 조금 더 먹을 수 있겠어요.
다행이에요. 그, 여러모로 무리하셨는데 체력 회복은 하고 갈 수 있겠네요.
시아록:그치. 슈슈는 발견한 거 있어?
슈테른:그런데 통조림...은 괜찮아요?
아, 전 이걸 찾았어요... 중요한 서류 같아요. (손에 들고 있던 걸 펼쳐보인다.)
그걸 보면, 서류라기보단 그저 수첩의 페이지 같......
아니, 이건... 익숙한 그 디자인입니다.
심지어 일기와 글씨체도 같네요. 이 방의 주인은 기록하는 걸 어지간히 좋아했나 봅니다.
시아록:통조림? 괜찮은 거 같은데..
(손에 들린 통조림을 확인하다가 네가 가져온 걸 본다.)
이거 내가 아까 책상 서랍에서 발견한 거랑 같은 거 같은데..
슈테른:아... 그, 그렇죠. 이상한 질문을 했네요.
책상 서랍...? ......
...무슨 내용이었어요? 읽어보고 싶어요.
시아록:(당신의 말에 책상에 가서 수첩을 가져와 건넨다.)
슈테른:(...약간의 텀을 두고 웃으며 받아들었다가, 술술 아래로 내려가던 시선이 어느 곳에서 멈춘다.)
...이곳에서 길잡이를 해볼까 한다. ...전에는... 하지? 돕지? 못했으니.
시아록:길잡이?
슈테른:... (끄덕이며 덮는다. 납득했다는 건지, 방금의 질문에 대답한 건지 모르겠다)
왜 이 부분만 지워둔 걸까요.
시아록:그러게..
슈테른:우리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누군가를 돕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닥쳐보지 않으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사람은 심적으로 강한 사람이었나 봐요.
시아록:그런 거 같아. 다른 칸에는 꽃씨들이 잔뜩 있었어.
(저도 꽃씨를 보고 이 방의 주인을 그렇게 생각했으니.)
슈테른:아, 이것도 읽어보세요. (일기와 함께 일지를 건네준다.)
시아록:응? 어디? (고개를 뺴꼼히 내밀어 당신이 건네준 일지를 쳐다본다.)
핸드아웃: 감염의 3단계
감염의 증상은 개인마다 제각각이지만, 나는 도저히 가망이 없던 사람들을 관찰한 끝에 공통적인 증세를 목격했다. 훗날의 누군가를 위해 기록을 남긴다. 이 문서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소중히 다뤄 주고, 기록을 남기는 과정에서 감염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의 평안을 빌어주기를 바란다.
1단계: 물린 직후. 체온이 점점 내려가다 어느 지점에서 멈춘다. 검은 물이 차갑지 않게 느껴질 정도라고 한다. 물린 상처 부위와 근처 핏줄이 파랗게 변하고 그 부위에 열감이 있다. 정신은 아직 또렷하지만 목이 무척 마르다.
2단계: 시야가 흐리고 어지럽다. 가끔 발을 헛디디거나 물건을 놓치기도 한다. 물린 부위의 파란 핏줄이 점점 번지고, 감각이 없어진다. 눈가가 시리며 동공이 창백해진다.
3단계: 동공과 흰자위 모두 파랗게 변화하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더듬고, 온몸이 벌벌 떨린다. 체온이 급격하게 오르다가, 다시 급속도로 낮아진다. 이 단계에서 눈을 감거나 정신을 잃으면 그대로 끝난 거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친애하는 메리,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하늘에서는 부디 편안하기를…
시아록:감염 단계... 친애하는 메리... 친한 사람이 감염되었었나봐..
슈테른:등대가 가까이 있어도, 결국 괴물이 되어버리면 백신을 맞추기 힘들 테니까...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고통을 끝내 주는 정도밖에 없었겠죠.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시아록:그러게.. 안타까운 일이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다 못해 침잠한 채입니다.
눈가가 붉습니다. 당신이 그걸 모른 척하건 그렇지 않건, 그는 천천히 일어나 소파에 앉듯 눕습니다.
시아록:괜찮아?
(오늘만 해도 똑같은 말을 몇 번째 당신에게 하는지. 당신에게 제대로 해줄 수 있는 건 없는 자신을 깨달으며 당신의 옆에 걸터앉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슈테른:...죄송해요. 생각이 많아져서... 전 괜찮으니까.
시아록이야말로 이만 쉬시면 좋겠어요. 아, 하지만 침대가 하나니까 같이 눕는 거...에요?
시아록:같이 눕는 게 왜?
슈테른:(뇌정지가 온 사람처럼 잠시 침묵하다가) ...네? 아, 아니에요.
얼마 만인가 싶어서요. 문이 잠기지 않으면 둘 중 한 명이 불침번을 설 때도 있었으니까...
시아록:그렇긴 하지.. 오늘은 편하게 같이 잘 수 있겠다.
(네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슈테른:그... 아니, 이럴 때가 아니죠. (당신의 곳곳에 감긴 붕대를 보고 황급히 일어난다.)
시아록:어.. ... (당신의 말을 듣고는 한참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느즈막이 입을 뗐다.)
글쎄, 모르겠는데. 그런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말 그대로 감히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이야기여서, 무언가 제대로 대답을 해야한다는 걸 막연하게 알면서도 백지화 된 머리로 버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슈테른:괘, 괜찮아요. 억지로 답하실 필요 없어요. 정말로... (덩달아 자기도 패닉한 듯 허겁지겁 돌아보고 살핀다.)
그냥 마음에 걸려서...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음, 그것보다 옷은 다 마르셨어요? 혹시 물에 빠지셔서 감기 기운이 있으신 건 아니죠? 필요하시면 제 옷이라도 드릴 테니까.
(맞을 지는 모르겠지만... 이라는 말은 안으로 삼킨다.)
시아록:(한껏 말을 돌리려는 너를 빤히 바라보다가 일상 이야기라도 하듯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것은 너를 비난도 아니오, 타박도 아니다. 그저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너에게 얘기할 뿐이다.)
아니, 억지로는 아니고.. 그냥 진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해야하나. 이런 상황인데도, 지금껏 한 번도 너나 내가 감염되면 어쩌지? 하고 걱정해본 적 없어. 그냥... 뭐라고 하지? 그냥 너랑 나 둘이면 등대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다야.
네 말대로 사실은 한 번쯤 생각해봤어야 할 문제일지도 모르는데.
슈테른:당신 추위 잘 타잖아요. 마침 가방에 모포도 있고... 말을 돌리려는 게 아니라 정말 걱정돼서 그런 건데. (표정이 살짝 뚱해진 채 듣는다.)
시아록:(뚱해진 네 얼굴이 귀여워서 웃으며 검지로 뺨을 콕 찔렀다.)
침대에 이불 있으니까 괜찮아. 정 추우면 나중에 꺼내 덮지 뭐.
슈테른:...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표정이 점점 묘해진다.) 어째서? (마찬가지로 타박하거나 의문을 갖는 게 아닌, 그저 순수하게 궁금한 눈치다.)
시아록:그러게. 어째서일까? 난 내 생각보다 희망 찬 사람인가봐. (이 방의 원래 주인처럼. 책상의 두번째 서랍 속 몇 종류나 되던 꽃씨들을 떠올리며 슬쩍 웃었다.)
슈테른:이불이 두껍긴 하네요. 마른 옷가지도 마침 몇 벌이나 찾았고. ...그, 그리고 정 안 되면, 그.... 제, 제가 끌어... 안고 있으면 따....... (거기까지만 말하고, 갑자기 저 혼자 돌아눕는다. 어쩔 줄 몰라하는 등 아주 난리도 아니다)
...저도 말해 두자면... 솔직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당신과 함께 등대까지 갈 거라고...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조금 어두워진 얼굴이지만, 그래도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다시 힘주어 말한다.) 정말로.
시아록:(얘기하다 말고 부끄러워진 듯 돌아눕는 당신의 빨개진 귓가를 보고 입꼬리가 올라갔으나 구태여 건들이지 않았다. 장난쳤다가 삐져서 침대에서 내려가 버리면 안 되니까. 그래서 가만히 당신이 돌아누운 채로 하는 이야기들을 귀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은 정말이라는 듯 다시 저를 향해 몸을 돌린 당신을 꾹 끌어안았다.)
같은 생각이네. 기분 좋다.
슈테른:(한창 진지하게 말하다가 갑자기 끌어안기면, 한동안 말이 없다. 보통은 부끄러워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스칠 때쯤 갑자기 온 몸을 부르르 떤다.) ...가, 가, 간지러워요.
아니, 간지러운 게 아닌가? 어쨌든... (중얼거린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딱히 팔에 힘을 풀지는 않는 걸 보면 싫진 않은 모양이다.) ...그, 그래도 다행이에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내내 묻고 싶었거든요. 당신이... (뒷말은 삼킨다.) 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이만 쉬죠.
노랫소리, 방해되세요? (당신의 예리한 감각을 신경쓰며 묻는다.)
시아록:(가만히 당신의 이야기를 듣다가 너에게 얼굴을 기댔다.)
괜찮아. 오늘은 그냥 잘 잘 거 같아. 우리 둘 다 피곤하기도 했고, 뭐랄까.. 노랫소리도, 추위같은 것도, 오늘밤도 그냥 다 괜찮을 거 같아.
슈슈는 노래 시끄러워?
슈테른:(당신과 함께 있는데 다른 게 신경쓰일까... 생각만 해도 부끄럽지만, 또렷하게 떠올라 사라지지 않는 말을 애써 꾹 누른다.) 앞으로도 이러면 좋겠어요. 함께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지는 않아도... 적어도 문제를 해결할 때 필요한 의지나 여유같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면.
저도 다 괜찮아요. (오늘 대체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말하는 걸까. 하지만 당신과 있다면 뭐든 괜찮았다.)
(바로 곁에서 들리는 숨소리와, 잔잔한 노랫소리를 자장가 삼아 서서히 눈이 감긴다. 칭얼대는 어린아이처럼 품에 더 파고든다)
시아록:(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제 품에 파고드는 당신의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당신의 숨소리에도, 당신을 달래듯 두드리는 제 손의 리듬에 슬금슬금 눈이 감겼다.)
시아록:(무언가,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뭐가 이상한지도 모르겠어서 제 눈치가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서.. 미약한 한숨을 쉬고는 당신의 말대로 시선을 돌리고는 '자연 속의 나침반들'이라는 책을 집어들어 펼쳤다. 등대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으니 뭔가 더 찾아가기 쉽지 않을까? 이게 정말 제목같은 책일지 모르겠지만.)
시아록:(유용한 이야기 같으면서도 그렇게 잘 아는 분야는 아니라서 별을 이용한 방법만 자세히 읽었다.)
슈테른:...통조림 가지고 올게요. 원하시는 종류 있으세요? (옆얼굴을 힐끔거리다 일어선다.)
시아록:슈슈가 고르고 남은 거로 먹을래.
(책을 덮으며 당신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꿈이 괴상해서였을까, 괜히 당신이 더 신경쓰인다. 꿈과는 전혀 다르게 멀쩡한 제 목을 손바닥으로 훑어내렸다.)
그는 조용히 끄덕이고는, 당신이 책을 읽는 동안 간단한 아침을 차립니다.
당장 묻고 싶은 건 많지만,
그는 마음의 정리가 아직 안 된 듯 허둥거리기만 합니다.
보세요, 지금도. 별안간 통조림 하나를 놓쳐서 쏟아버렸습니다.
당신도 당신대로 오늘은 기분이 좀 싱숭생숭하네요.
그렇게 평소보다는 조금 더 처진 아침이 지나갑니다.
시아록:
심리학
기준치:
45/22/9
굴림:
33
판정결과:
보통 성공
(통조림을 떨어뜨린 당신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다가갔다.)
괜찮아, 슈슈?
(역시 어딘가 이상해..)
얼굴이 어둡습니다. 단순히 다크서클이 쌓여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얼굴에 감도는 기색은,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어딘가 불편해 보이지만, 그런데도 한구석에서는 편안해 보이는 표정입니다.
이를테면, 체념 같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흐릿하던 두 눈에 이지가 차오릅니다.
슈테른:오늘은 최대한 빨리 등대까지 가는 게 목표에요.
시아록:슈슈? (너무 갑작스레 달리진 기색에 당신의 이름만 불렀다.)
슈테른:...등대에 무슨 일이 생겼더라도, 확인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요.
망설이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시아록:그렇긴... 하지만...
(등대는 그저 너와 내가 안전하기 위해 가는 장소일 뿐이지, 등대 안의 사정이 어쩌건 사실 자신에게는 전혀 상관없었다. 그러나 아까전과 다르게 기묘하게 맑아진 눈빛과 정말로 희망을 가진 건지 아니면 그거라도 쥐고 있어야겠는지 모르겠는 당신의 단호한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슈슈는 빨리 등대로 가고 싶은 거지?
슈테른:빠르면 빠를 수록 좋겠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니까. ...아, 그렇다고 무리하라는 건 아니에요.
그야 저한테 중요한 건 등대가 아니라... (잠시 뜸을 들인다. 여유가 없이 살아서 그런지 말을 끊어내는 빈도수가 늘었다.) 전 당신과 함께 등대까지 갈 거에요. 그거면 됐어요. 설령 등대의 빛이 꺼졌다고 해도… 그걸 위해 우리가 쏟은 노력엔 의미가 있고,
목표 같은 건 다시 찾으면 되니까. (꼭 당신에게만 말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시아록:그래, 그렇게 하자. 등대에 갔다가 무슨 일 있다면... 그건 그 때 또 다음을 정하면 되겠지. (그게 저희를 무한한 굴레에 가두더라도 당신이 지치지 않는다면 되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느라, 당신은 무지성으로 눈앞에 놓인 통조림을 떠먹습니다.
뭔지도 모르고 그저 입에 넣어버렸네요.
오늘의 식사는... 1 골뱅이 2 과일 3 생선 1
골뱅이인 것 같습니다. 식감이 아주 쫀득하고, 적당히 짭짤한 맛 뒤에 약간 고소한 맛도 묻어납니다.
통조림답게 겉면은 약간 딱딱하고 건조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안쪽에 숨은 살이 더욱 촉촉하게 느껴집니다.
시아록:아, 골뱅이. (아무생각없이 입에 쑤셔넣은 게 오랜만에 먹는 골뱅이라니.) 슈슈도 먹어볼래? 맛있네.
멸망 전에 먹었던 것과 다름없는 맛이 묘하게 향수를 자극합니다. 맛도 괜찮고, 영양분 섭취에도 유리하죠.
슈테른:(전에는 못 먹던 음식이라, 순간 심호흡을 한다.) ...한 입만요. (무슨 생각인지, 평소엔 콩이나 과일 통조림만 먹었으면서 오늘은 하나를 받아먹는다.)
시아록:많이는 말고 조금만.
(네가 안 먹는 걸 알면서도 너무 오랜만의 골뱅이에 순간 들떠선 너와 음식을 공유하고 싶었었다.)
슈테른:...지금 충분히 안 먹어두면 이따 힘들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새로운 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내쳐지는 세상이다. 거부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미 수많은 죽음을 밟고 선 인류면서 이런 걸 가리는 게 의미가 있을까,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맛있네요. (마음에 없는 말이지만, 그래도 결의에 찬 어조로 중얼거린다.)
그럭저럭 평화로운 식사가 이어집니다. 생수는 누군가 다 마셔버려 짠 입을 헹굴 순 없었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건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변화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핏줄이 번지고 뻗어나가는 것처럼, 서서히 다른 이상한 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체온이 급격하게 올라가고, 흰자위가 점점 창백해집니다.
숨은 난잡하기 그지없고, 초점은 제대로 맞을 일 없이 시선이 사방으로 흩뿌려집니다.
시아록:언제부터 이랬어? (오열과도 닮은 작은 목소리가 잇새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수첩에서 읽은 증상을 눈으로 급하게 확인하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토할 것처럼 끔찍한 기분을 느끼며 제 좋지도 않은 머리가 온갖 생각을 맹렬히 떠올렸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하는데? 결론은 하나지.) 백신..
그렇다고 그를 두고 혼자 갔다오기에는, 이 빌딩에 홀로 뒀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니, 무엇보다, 감염이 진행 중이니 다녀온 뒤에는 이미 모든 게 늦었을 지도 모르고요.
희망의 상징이었던 등대가 바로 앞에 있는데,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야속합니다.
깜빡거리는 불빛이 오늘따라 우리를 조롱하는 것만 같습니다.
무심코 그의 손을 꽉 쥐었을까요? 그가 뒤척입니다.
시아록:(그치만 어떡하지? 혼자 두고 가기도, 함꼐 수영해 가기도 불가능한 일에 가까워서 까득까득 손톱만 물어뜯었다. 흘러가는 시간은 야속해서 마른 눈에 열이 올랐다.)
슈테른:...시, 아록... (겨우 낸 목소리는 쥐어짜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다. )
시아록:슈슈?!
슈테른:...미안해요. (고통 때문에 생리적인 눈물이 흐른다. 마치 이 말을 할 때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을 내뱉자마자 표정이 편해지더니, 몸이 축 처진다.)
시아록:아냐아냐아냐! 네가 왜 미안해! (고개를 정신없이 흔들며 벼락처럼 외치고는 축 늘어진 당신의 몸을 끌어안고 이를 악물었다. 눈동자가 구르며 다시 급하게 생각에 잠겼으나 어차피 백신은 등대에만 있으니 답은 하나 뿐이었다. 답은 하나. 같이, 등대까지 갈 것. 그럼 배나 판자같은 거라도 없나. 혼자 헤엄쳐서 끌면 되지 않을까. 무심코 떠오르는 나쁜 생각들은 의식적으로 쳐내며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태로 움직이는 건 힘들어 보입니다.
1시간 거리를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사람 한 명을 끌고 가는 건 도저히 무리입니다.
시아록:(슈슈의 상태를 보고있자니 괜히 신경쓰여서 인상만 썼다. 편하게 공격하기도 글렀다. 마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냥 빨리 여기서 쫓아낼까?)
쫓아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요?
시아록:(소리에 예민했던가.. 소리를 내면 쫓아나가려나.. 둔감해진 머리가 어설프게 방법을 떠올렸다. )
큰 소리를 내면 반응하기는 하겠지만, 괴물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방에서 나갈 것처럼은 안 보입니다.
실제로 당신을 발견한 괴물이 아무렇게나 팔을 휘두르며 점점 구석으로 붙고 있을 뿐이니까요.
시아록:... (한숨을 내뱉고 일단 문안으로 발을 옮겼다. 슈슈를 잠시 안전한 곳에 눕히고 끌어내던가 해야지.. 위협적으로도 느껴지지 않는 팔의 움직임을 보다가 모포와 옷가지들을 가방에서 잔뜩 꺼내 그와 반대편에 눕히고 덮고 싸매고는 고개를 구석의 괴물에게로 다시 돌렸다.)
그를 보호하듯 감싸두자 몸이 덮여 있던 경련이 조금씩 가라앉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구석의 괴물은 손발을 다 휘저으며,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약해진 괴물:--! -!
귀가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자, 저 멀리에서 다른 무언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어떻게 하나요?
시아록:(갑자기 달라진 괴물의 태도에 놀라긴 했지만, 어차피 쫓아내던지 아니면.. 다른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일단 손도끼를 꺼내 쥐고서 위협하듯 밀어냈다.)
[1번째 기록] 벌써 사흘이 지났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진 만큼 지금 상황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게 중요해졌다는 생각이 들어 일기를 쓴다. 우리는 우선 더 높은 빌딩으로 피신했다. 여기마저 잠기면 목숨을 걸고 헤엄쳐야 한다. 쫓기는 신세나 다름없는데도 붙잡아주는 손이 있으니 어쩐지 두렵지 않아. 이건 자존심일까, 용기일까.
[6번째 기록] 배낭을 감싸던 비닐이 찢어져서 많은 것들이 젖었다. 다행히도 이중으로 감싸 둔 수첩과 여분 옷은 무사했지만…… 라디오에서 생존자가 모이는 빌딩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새벽이라 당장 움직일 수는 없지만, 해가 뜨면 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12번째 기록] 괴물이 생겨나고 있다. 핏줄이 파랗고 비늘과 손톱이 돋아 있었다. 겨우 도망쳤지만… 바닥에 흐르던 건 분명 피였다. 붉은색… 괴물이 흘린 걸까, 다른 생존자가 흘린 걸까? 어느 쪽이든 유쾌한 경우의 수는 아니다. 우리는 무사할 수 있을까… 무사할 거야.
[17번째 기록] 빌딩에 도착했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시체 중에서 부모님이 계실까 싶어서 당신이 말리는데도 막무가내로 뛰어들었다가… 괴물로 깨어난 사람이 있어서 죽을 뻔 했다. 시아록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시아록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쉬고 있다. 다음부터 이런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약속했다.
[50번째 기록] 밤에 잠깐씩 조명이 켜지는 건물을 찾았다. 이 시대에 전기가 연결되는 것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사람의 흔적일지도 모르니까… 우선 그쪽을 목표로 향하고 있다.
[52번째 기록] 라디오에서 방송이 나왔다. 사람 목소리였다. 백신이 있다고 했다. 생존자들도 있다고. 우리가 여기 있으니, 희망을 잃지 말라고…. 우리는 저 빌딩을 등대라고 부르기로 했다.
시아록:일기장이구나. (읽으면서 힐끔 슈슈에게 시선이 향한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분명 슈슈와 함께 지내면서, 등대 외에 다른 목표를 정한 적은 없거든요.
하지만 일기에는 분명 당신과 그가 생존자를 찾기 위해 빌딩을 향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당신이 잊어버릴 리가 없을 텐데…
...뒤로도 페이지가 이어집니다.
읽어 볼까요?
시아록:(의아한 기분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기록이 잘 적혀 있던 수첩에 갑자기 빈 페이지가 생겨납니다.
몇 장이나 백지가 이어지더니, 곧 덜덜 떨리는 글씨가 뒤를 잇습니다.
핸드아웃: 슈테른의 노트―2
[…… 번째 기록] 기록하지 못했던 사흘간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야 펜을 들 정신이 생겼다. 시아록은…… 배가 고픈지 울부짖다가 지금은 잠들었다. …… 당신이 차라리 나를 탓해 주었더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당신은 정신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울지 말라며 나를 달랬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서 당신의 호흡 소리에 숨을 맞추고 있다.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번째 기록] 등대로 가야 한다. 아집일 거라 생각하지만…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죽게 둔다는 선택 따위는 떠올릴 수 없다. 일주일이나 시도해 봤지만 여전히 통조림은 드시지 못하고 계신다. 나를 먹이로 준다면 덜 배고파하실까? 하지만, 사람을 먹게 두는 건 당신이 바랄 것 같지 않다. 어떻게 하면 좋은 걸까.
[…… 번째 기록] 생존자를 만났었다. 총알이 스친 게 아니라면 나는 이미 죽었겠지. 괴물이라는 말이… 순간 누구를 가리킨 건지 헷갈렸다.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겠지. 알고 있다. 하지만… …… 요즘은 당신에게 자꾸 말을 걸게 돼요. 어제는 검은 파도가 몰아치기 전 마지막 날에 대해 얘기했어요.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지만, 이렇게 자꾸 당신과의 추억을 되짚다 보면, 계속 당신과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지금도 이렇게, 말하듯이 적게 되네요. 외로운 걸까요. 하지만, 버틸 거에요.
시아록:그랬구나.. (어째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을 때도 늘 제 눈은 버석했는지 알 것 같았다. 혼자 살아남지, 뭐하러 여기까지 저를 힘겹게 끌고서 왔냐고 말하지 않는 건 저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 네가 무슨 마음으로 매달려있었는지 너무나도 잘 알아서 무너져 내린 무릎걸음으로 네게 다가갔다.)
괜찮아? (한숨처럼 같은 말을 내뱉고 네 머리카락을 손톱끝으로 닿지 않게 넘겼다.)
슈테른:...괜찮아요. 당신이 충격을 받거나, 절 원망해도. 그것도 다 끌어안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등대에 가면 당신을 되돌릴 수 있을 테니까.
시아록:글쎄, 그런 기분은 아닌데. 너나 나나 너무 미련해서 웃음이 나. (헛웃음 지어진 입가는 그저 일그러지기만 했을 터여서 너는 전혀 못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어딘지 가슴 속이 체한 듯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등대에 다녀올까?
(백신은... 저는 안 들어도 너는 듣지 않을까?)
슈테른:하지만, 당신이 저 때문에 인간을... 죽였어요. (흘릴 눈물은 이미 어제 다 흘려버려서, 더는 울지도 못한다.)
인간의 이성을 되찾은 당신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당신과 다른 종족을 괴물로, 같은 종족을 인간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됩니다.
사람의 손을 바로 전까지 탄 안식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사람이 아닌 괴물이 있었던 것도, 괴물들이 너무나 쉽게 쓰러진 것도,
괴물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람의 말을 하던 것도.
시아록:그게 왜 너 때문이겠어. (예전 같았으면 경악하고 무너졌을 상황들에도 이성을 찾았어도 괴물이 된 탓일까, 아니면 제눈엔 괴물로 보였기 때문일까. 어쩐지 그렇구나, 하는 감상평이 잠깐 남았다가 이내 흩어졌다. 늘 중요한 건 너 뿐이라서.)
괜찮아. (제 입에서 튀어나오는 건 다시금 똑같은 말 뿐이다.)
슈테른:(등대에 갈 수 있을까. 누군가 우리를 받아주기는 할까. 감염된 상처보다도 당신을 구할 길이 없다는 게 무서워서... 그저 당신을 끌어안고, 비늘로 뒤덮인 한쪽 어깨에 얼굴을 댄다.) 제 감염 속도가 평균보다 느리긴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기침 소리가 나더니 온몸이 들썩인다.)
시아록:(기침에도 몸이 흔들리는 네 등을 느리게 두드렸다.)
슈테른:...그래도, 말했잖아요.
어떻게든 당신과 함께 등대까지 갈 거라고.
고통 같은 건 벌 받는다고 생각하고 전부 견딜 테니까... (손을 더듬는다. 결국 당신의 손에 씻길 수 없는 피가 묻었음을 직감한다. 그렇게 만든 건 자신이라는 것도.)
데려가 주실래요.
시아록:그래, 같이 가자. (형용할 수 없는 기분으로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네 손을 잡았다.)
슈슈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몸을 던져 대신 감염된 당신.
그런 당신을 구하고자 버틴 끝에, 당신을 이곳까지 끌고 와서는, 당신이 다른 사람을 무는 걸 막기까지 한 슈슈.
응.. 도착했어. (했는데.. 라는 뒷말은 잠깐 삼켰다가 입을 열었다.) 불이 꺼져있어..
혹시나 해서 건물을 올려다봐도, 분명히 등대 건물은 맞습니다.
잘못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희망을 품지도 못할 거란 소리입니다.
슈테른:괘, 괜찮... 은데... 몸에 감각이 없어요. (팔을 부여잡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한다.)
건강
기준치:
30/15/6
굴림:
36
판정결과:
실패
몸의 일부가 얼어붙은 사람처럼 벌벌 떨던 그는, 다리를 조금 드는 동작만으로도 고꾸라집집니다.
더 움직이지도 못하네요. 게다가 통각이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것 같고요.
시아록:(깜짝 놀라 당신의 팔을 붙잡는다.) 전혀 안 괜찮잖아.
(살짝 찌푸려진 미간으로 움직이기도 힘겨워보이는 당신을 훑어보다가) 그냥 슈슈가 안기거나 업히는 게 편하겠는데..
슈테른:(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저, 좀... 옮겨주세요.
무, 무겁겠지만... 같이 가기로 했으니까. (이 와중에도 업히는 게 신경쓰이는지 목소리 톤이 어긋난다.)
시아록:무거울 리가 없잖아? (그대로 당신을 안아들었다.)
지금의 몸은 힘줄도 억세고, 근육도 아주 단단합니다.
성인을 거대 인형 안아올리듯 가볍게 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당신에게 안긴 그는 탁해진 눈으로, 자조적으로 웃습니다.
슈테른:...원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거나 환각을 보는 당신이 길을 잃지 않게, 제가 이끌고 갈 예정이었는데.
시아록:그랬어? (당신의 말에 웃으며 여상하게 대답했다. -제 웃음이 정말 웃음소리처럼 들리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만.-
슈테른: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반대가 됐네요. (안긴 채로 당신의 앞머리를 쓸어내린다. 얼굴 근육이 움직이며 비늘끼리 맞부딪히고 끼기긱, 하는 소리를 내는 것 같지만, 곁에서 워낙 오래 지켜본지라 그게 기분이 좋다는 의사 표시인 건 알 수 있다.) 그래도 제가 없으면 백신을 구하기 힘들 수도 있으니까 조금만 더 참으세요.
시아록:(무얼 참아야 한다는 말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린 백신을 찾으러 가자.
이 신체는 육지 생활에 적합하진 않지만, 소중한 사람을 안고 달리는 지금 당신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급합니다.
마침내 입구 바깥까지 나왔을 때쯤,
쿠궁――
셔터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소리를 내며 닫힙니다.
아니, 어쩌면 내려앉는 건 문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희망도 함께일 겁니다.
땅을 울리는 진동이 음울하고 짙은 건, 그 때문일 테죠.
한참을 사람들이 움직이고, 떠나갑니다. 여기서 떠나겠다는 목적이나마 쥐었기 때문일까요,
사람들에게선 이제까지 중 제일 생기가 묻어납니다.
...
흑색의 바다가 희고 덧없는 거품을 내며 밀려옵니다.
조용해진 백사장에는 이제 우리만 남았습니다.
말이 없는 건, 각자의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일까요.
우리에게 남겨진 백신은 단 한 사람의 분량입니다.
그것이 말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백신이 든 주사기는 그 효과에 비해 아주 가볍지만,
이것을 누구에게 쓸지에 대한 선택은 결코 가벼울 수 없겠죠.
그러다 보면 새삼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이성이 우리를 사람으로서 남게 해주는 요인이라면…
당신의 백신은 등대가 아니라, 바로 옆에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슈테른:...당신이 맞게 할 생각이었는데...
제가, 완전히 변하면... 어떻게 하실 거에요?
시아록:(빤히 당신을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음, 고작 한 사람 분량인데 날 맞히겠다고? 왜?
슈테른:그야, 한 사람 분량밖에 없으니까...?
연구, 원들의 말대로라면... 당신은... 백신을 맞으면 돌아갈 수 있잖아요.
시아록:그러니까, 나는 안전하잖아? 나중에 새로 백신을 구해서 맞아도 될 일이지.
슈테른:하지만 그건... 긴 기다림이 될 거에요.
당신이 언제 정신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괴물로 돌아갈지, 그때까지 백신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전부 모르는 일이고.
시아록:아냐, 난 괜찮을 거야.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백신은, 아마 언젠가는 성공하겠지. 그 사람들 별로 포기한 것 같진 않던데.
슈테른:제가 안 괜찮아요...... 전 당신이 백신을 맞으면 좋겠어요. ...생존자분들이 당신에게 모진 소리를 들을 때 제 심정이 어땠는지 알아요?
그분들 탓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제가 같은 처지였어도 조금은 그런 생각을 했을 테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적대할 거에요. 등대가 특수한 상황이었을 뿐이지, 당신이... 언제 우리가 죽여온 괴물들처럼 피를 흘리게 될지 알 수 없잖아요...
전 어차피 절 이용해서 백신을 얻어내고, 당신에게 맞히는 것밖에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 러니까 저도 괜찮을 거에요.
시아록:모진 소리.. (딱히 나쁜 이야기를 들었다는 자각은 없었다. 어차피 스치듯 지나가는 소리같았고, 마음에 와닿지도 않았다. 남들의 이야기가 나에게 중요하던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너에게는 그게 멍이 되었을지 몰라도, 제게는 그러했다. 그래서 저는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슈슈는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나는 애초부터 혼자 맞을 생각 전혀 없었는데.
그리고 나중엔 사람은 안 남을지도 모르지. (제대로 된 백신이 먼저 개발되는 게 빠를까, '우리'가 모든 인간을 감염시키는 게 빠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슈테른:당신이 상처받지 않은 건 기쁘지만...... 역시 전 모르겠어요. 당신의 말마따나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포기해서 모두가 괴물이 되는 것보단 당신이 위험해지는 게 빠를 거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백신이 개발되는 게 아무리 잠깐이라도, 잠깐인 만큼... 당신이 위험할 일은 이제 없었으면 해요.
...이대로면 많은 게 문제가 돼요. 괴물은 원래 인간을 먹고 살잖아요. 전 당신을 그렇게 둘 자신이 없지만, 당신이 제대로 먹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제 싫어요... 떼 쓰는 소리지만. (당신을 끌어안고 목께에 고개를 부빈다. 비늘에 쓸려 상처가 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고개를 파묻어버리는 게 무언가를 외면하고 싶기라도 한 것 같다)
...하지만, 시아록이... 제가 괴물이 됐을 때 또, 똑같은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없어서.
시아록:(가만히 들으며 당신의 등을 토닥였다.) 맞아. 나도 슈슈랑 똑같이 행동할 걸. (이런 고집불통인 점이 같다는 게 좋은 일인 건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같은 점이 있다는 건 마음에 드는 일이다.)
그리고 있잖아. 난 어차피 한 번 이성을 찾아봤으니 한 번 더 잃더라도 다시 찾을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가 있다면 그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다. 넌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거 같지만. 지금껏 잘해오지 않았나. '잘' 해왔다는 말에 너는 부정할 지도 모르지만.)
슈테른:차라리, 혼자 맞을 생각이 없다면... 이 작은 분량이라도 나눠서... (하지만 충분한 양을 주사해 감염 단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미래는 없다. 이성은 침몰하여 저 아래에 가라앉겠지. 이번엔 건져올려 줄 사람도 없이. 당신을 구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차선의 방법이 있다는데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해서, 마음이 타버릴 것 같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네요. 당신이 제가 겪은 일을 똑같이 겪게 하거나, 늘 배고픔에 시달리며 죽을 위험에 빠트리거나. (어느 쪽도 고르고 싶지 않다. 얄궃은 상황에 시간만 흘려보낸다. 왜 당신을 온전하게 구원할 수 없는 걸까. 더 좋은 선택지가 있었을까. 지금까지 당신을 '구하려고' 해온 노력에 의미는 있던 걸까... 끝도 없는 후회가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다시 물을게요. 당신이 백신을 맞고 절 내버려둘 생각은... 정말 없어요?
정말... 괜찮겠어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멸과 모함을 받고, 어디에도 합류하거나 환영받지 못하고, 괴물과 인간의 경계에 애매하게 걸쳐져 평생 정처없이 이 검은 바다를 떠돌게 된다고 해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라고 해도...? (말을 내뱉으면서도 힘이 빠진다. 자신이 생각하는 당신이라면 무슨 답을 할지 이미 정해진 까닭이다.)
시아록:없지? 너도 못 한 걸 나보고 하라고? (네가 걱정과 후회와 체념과도 비슷한 무언가들이 가득한 말들을 내뱉는 걸 보는 데도 어쩐지 웃음이 났다. 진짜로 저한테는 당신이 말하는 그 모든 게 정말로 별 것 아니라서. 온전히 너만 괜찮다면 다 괜찮아서. 그래서 웃음이 났다.)
너만 있으면 다 괜찮은데. (그냥 삼키려고 했던 말을 구태여 입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이게 얼마나 나에게 중요한 일인지 너도 알 필요가 있었다.)
슈테른:......바보. (결국 참고 참았던 말이 역류한다. 말을 뱉은 뒤에 스스로도 놀라지만, 부정하는 대신 또 다른 묻어둔 말을 꺼낸다.) 저도에요. 사실... 당신이 없으면 이제 어딜 향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살아갈 순 있겠지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정말 죽을 때가 된 건가. 평소에 했으면 죽을 만큼 부끄러워할 법한 말이 술술 나온다)
당신이 괜찮다면, 저도 괜찮으니까. 어차피 등대도 당신을 되돌리겠단 심정으로 향한 거였고... 사실 그 전에도, 늘 목표엔 당신이 섞여있던 것 같아요.
이젠 당신이 제 등대가 된 셈인 거에요. 처음엔 당신을 살리려고 등대에 갔었는데... 이제 반대가 됐네요.
...얼마나 더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힘 닿는 데까지 속죄하고, 당신을 지킬게요. 전처럼 당신이 절 구해주면, 저도 당신을 구해줄게요. 그러면 되는 거죠? (한숨처럼 웃고, 파묻었던 고개를 빼내어 두 눈을 마주한다. 전에 쉼터에서 나누었던 대화처럼.)
시아록:응, 나도 늘 그랬어. 지금까지처럼 서로 구하면서 가보자. 앞으로 함께 나아가는 데는 그걸로 충분해. (너와 두 눈을 마주치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새로운 목표가 정해졌다. 그게 너와 나를 앞으로 살리고 함께 하게 될 것들이라 기분 좋게 웃었다.)
결정을 내렸다면 이제 백신을 주사할 때입니다.
슈슈는 이제껏 당신과 대화한 덕에 정신이 흐려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둘이 이별하는 일은 기필코 없겠죠.
앞으로 많은 난관이 있을 겁니다.
불확실한 미래. 우리를 적대할 사람들. 언제 파도에 쓸려나가 지워질 지 모르는 두 사람의 생.
그럼에도 어쩐지, 이게 작별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옵니다.
당신은 슈슈도 당신과 똑같은 표정일 거라 확신하며, 주삿바늘을 그의 피부에 찌릅니다.
새빨간 액체가 푸르게 변한 슈테른의 핏줄 속으로 들어갑니다.
백신을 위해 무리한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피곤하지만,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는 건, 함께 있는 이 상황이 꿈처럼 연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겠죠.
곧 슈슈도 전전히 눈을 감습니다. 푸르게 돋은 핏줄이 가라앉고 비늘은 떨어져나가며,
변형됐던 손발의 일부도 당신이 익히 아는 형태로 되돌아옵니다.
당신에게 또 다른 의미의 백신을 준 사람.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구원을 준 사람이, 당신의 손으로 구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