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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록슈슈] 우리는 벚꽃이 지지 않는 세계에 산다

퍄퍙책미 2024. 8. 21. 23:49

KPC 프루헤 슈테른     PC 시아록

날짜 2024.06.29 ~ 2024.07.03

플레이타임 총 7시간

원문 시나리오 링크    https://www.postype.com/@dear-heresy/post/11864184

 

 

 

※아래 내용은 플레이로그입니다. 시나리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므로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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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선1
 
세카
 
w. 청서
 
구분선2
 
 
문을 열자마자 산뜻한 향이 코를 간지럽힙니다.
 
절대 아름답지만은 않은 분홍색 눈이 잿빛 하늘에서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칙칙한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서는 사람들의 행렬에 당신 역시 합류합니다.
 
몇몇 동급생들이 당신의 얼굴을 알아보며 반깁니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대부분은 고지대로 피난 중입니다.
 
당신은 휘날리는 벚꽃 눈을 보며 여태까지의 일을 아스라이 떠올립니다.
 
...
 
지금은 겨울,
 
당신은 고등학교 3학년입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잿빛 하늘은 청량했고, 대기는 맑았습니다.
 
수험의 끝부터 졸업식까지의 시간은 마법과도 같아서,
 
어쩐지 붕 뜬,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한가한 일상에 잠식되고 있었습니다.
 
12월 25일에 내린 첫눈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장식해
 
친구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기뻐했습니다.
 
그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우리는 모두 내리는 눈이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단비처럼 찾아온 눈이 폭설이 되고,
 
연신 전날의 기록을 갈아치우던 순간까지,
 
그 누구도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
 
어느 높은 곳에서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하염없이 쏟아지던 꽃잎은
 
이내 마을의 낮은 지대부터 집어삼켰습니다.
 
이러한 기현상은 국내 곳곳에 보도되었고,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찾아와 노력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
 
현재, 우리는 다양한 곳의 지원을 받아,
 
꽃잎에 잠식된 마을을 버리고 높은 곳으로 대피하는 중입니다.
 
당신은 동급생 무리에 껴서 짐가방을 들고 가벼운 사담을 나눕니다.
 
그 사이에는, 슈테른 역시 있습니다.
 
친구들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 벚꽃이 계속 쌓이면 결국 도망갈 수 없게 된다는 비관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어차피 수험이 망해서 속상했는데 이렇게 되니 차라리 속 시원하다는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시아록:(하늘에서부터 무수히 흩날려 떨어지는 벚꽃잎을 한참 보다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알 수 없는 이 기현상은 여전히 현실감 없이 아름다우나, 모든 곳을 벚꽃잎으로 채우겠다는 양 떨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그저 심란했다.)
진짜 언제까지 떨어지려나...
 
슈테른:(아까부터 시종일관 불편한 표정으로 일행을 따라 걷는다. 대화에 끼지는 않고 비껴가듯이 유독 느리게 따라온다.) ...아래쪽은 역시 전부 잠겼네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말 평화로웠는데...
 
시아록:그러게. ...분명 재앙같은 일인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야. (당신의 말에 아래쪽을 한 번 쳐다보며 대답했다.)
 
두고 온 건 없던가요?
 
아니, 돌아보는 곳에 놓치고 온 것들은 모두 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돌이킬 수 없는 일상이라거나.
 
그나저나, 마찬가지로 뒤쪽을 자꾸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집니다.
 
옆의 슈테른이 유독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네요.
 
...이쪽이야말로 뭐 신경쓰이는 거라도 있나?
 
시아록:왜 그래? 뭐 두고 왔어? (덩달아 신경쓰이는 듯 당신의 시선을 함께 따라갔다.)
 
슈테른: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색하게 눈을 피한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상황이 반복됩니다.
 
얼마 가지 않아 슈테른은 무언가 결심한 듯
 
자신의 캐리어를 당신에게 건네며 말합니다.
 
슈테른:죄송하지만, 잠깐만 맡아주실래요?
저, 학교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시아록:어? 지금? 학교를 간다고? (얼떨결에 당신이 내민 캐리어를 받았다가 당황한 얼굴로 당신을 쳐다봤다.) 정말 뭐 두고 왔어? 나한테 있는 거면 줄 테니까. 학교도 벚꽃으로 잠겨있을 거고, 학교까지 가는 길도 잠겨있을 텐데 위험해.
(당황한 채 급하게 당신을 만류했다.)
 
슈테른:아, 아뇨, 정말 그러실 필요 없어요. 여기서부터 멀지도 않고, 잠깐 갔다오기만 하면 되니까...
저, 정말 잠깐이면 되니까, 벚꽃은 잘 헤치고 오면 되니까...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횡설수설하며) 그, 다녀올게요.
 
당신이 당황하는 사이 가방을 떠넘긴 슈테른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아래로 빠르게 내려가 학교로 떠납니다.
 
...넘겨받은 가방은 엄청나게 무겁고 큽니다.
 
대체 이 안에 아직도 못 담을 게 뭐가 있었을까요.
 
발걸음은 어찌나 빠른지,
 
금방이라도 시야에서 사라질 것 같습니다.
 
시아록:(떠맡겨진 캐리어 손잡이를 붙잡고 있다가 빠르게 사라진 당신을 미처 잡지도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당신이 떠난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렸다.) 아니, 이 위험한 상황에 학교를 왜 가..!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할 것 같은데요.
 
본인은 한사코 고집을 부렸지만,
 
역시 그냥 보고 있기에는 조급해질지도 모르겠네요.
 
차라리 같이 따라가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반,
 
이런 상황에 자신도 위험해지기 전에 피해야겠단 생각이 반.
 
당신은 어떤 생각의 손을 들어주고 싶나요?
 
시아록:(잠깐 안절부절 못하며 사람들이 올라가는 위쪽과 당신이 떠난 아래쪽을 번갈아보다가 결국 지나가던 친구들을 붙잡고 제 것과 슈슈의 캐리어를 맡겼다.) 진짜 미안한데, 이거 좀 같이 챙겨서 올라가 주라. 학교에 잠깐 좀 다녀올 일이 있어서. (냅다 손에 캐리어를 쥐어주기만 하고 대답도 안 듣고 당신을 따라 급하게 발을 옮겼다. 양심상 등에 맨 가방은 맡기지 않았다.)
 
역시 저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놓쳐서 사라져버리면,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당신은 발을 뻗었고,
 
거기에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구분
 
구분
 
당신을 붙잡거나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떤 기이한 인력에 의해 이끌리듯
 
당신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당신이 위험하다는 건 슈테른이 위험하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따라가는 거니,
 
깊숙하게 들어가기 전에 데려오면 됩니다.
 
……라고 생각했지만,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벚꽃의 파도를 헤치고
 
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슈테른이 눈앞에 보입니다.
 
정말 바다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무거워지고 한기가 느껴집니다.
 
벚꽃은 당신의 종아리를 헤칩니다.
 
열심히 쫓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의 속도에 발맞추려면 민첩 판정합니다.
 
시아록:
민첩
기준치: 70/35/14
굴림: 97
판정결과: 실패
(열심히 벚꽃의 바다를 헤치며 나아가지만 영 쉽지 않다.)
 
더 이상은 당신의 다리가 따라주질 않는데,
 
슈테른은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습니다.
 
대체, 저렇게까지 걸음을 서둘러서 무얼 붙잡으려는 걸까요?
 
좀 더 힘내고 싶다면 강행 판정이 가능합니다.
 
시아록:
민첩
기준치: 70/35/14
굴림: 58
판정결과: 보통 성공
 
달려나가는 발걸음이 겨우 속도를 되찾고,
 
뛰면서 흔들던 손이 마침내 다른 누군가의 손을 잡습니다.
 
붙잡힌 슈테른이 돌아봅니다.
 
슈테른:......누, 누구?! 아, 시아록...?
왜,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가만히 계셔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시아록:(당신의 손을 잡고 헉헉 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위험하게 혼자 가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 학교엔 뭐 중요한 게 있어서 이 와중에 여기까지 내려온 거야.
 
당신의 질문에도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습니다.
 
그저 입술을 꾹 물다가,
 
곧 결연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슈테른:학교에 두고 온 게 있어요. 저는 그게 없으면 안 돼요.
시아록은 먼저 올라가 계세요. 저는 그것만 챙겨서 정말 금방 돌아올 수 있어요.
 
시아록:그럼 같이 학교까지 갔다 가. 어차피 나도 내려왔고.
 
슈테른:...정말 금방이면 돌아올 수 있다니까요...
추위 많이 타시잖아요. 계속 여기 있으면 불편하실 거에요. 옷에도 벚꽃이 잔뜩 묻으실 거고...
저처럼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실 텐데, 정말로 같이 가시겠다고요....?
 
시아록:벚꽃 묻은 건 털면 되고, 이미 내려오면 다 묻었으니까 상관없어. 이런 실랑이하고 잇는 것보다 얼른 같이 학교 다녀오는 게 우리 빠르지 않을까?
 
슈테른:... (그 말에 뭐라 더 말하지 못하고 성큼성큼 앞장선다.)
 
슈테른은 당신을 떼어놓으려 하지만,
 
당신은 한사코 붙어서 그를 따라갑니다.
 
찬 바람에 이리저리 휘말리는 희뿌연 분홍색 꽃잎이
 
머리에, 눈에, 코에 떨어집니다.
 
슈테른:말로는 금방이라고 했지만, 정말 잠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에요. 원래는 뛰어서 1분이면 주파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가는 데만 몇 분은 걸리겠죠....
...벚꽃 눈은 정말 어쩌다 내리게 된 걸까요? 그것도 왜 하필 저희 지역에만...
 
시아록:나도 알지, 그러니까 얼른 다녀와야지. 시간이 지날수록 돌아가기 더 힘들겠지? (쉬지 않고 당신을 따라 걸었다.)
그러게.. 왜 우리지역에만 그것도 벚꽃잎이 내릴까. 그치더라도 치우는데 한참 걸리겠지만.. 얼른 그치면 좋겠네.
 
슈테른:이것도 눈이라면, 언젠가는 분명 녹아서 사라지리라고... (급한 걸음에 벅찬 숨을 헉, 내뱉었다. 하지만 쉴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해요. 어떤 겨울도 영원하지는 않으니까요.
눈이 그치고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어떤 걸 하고 싶으세요...? 저희도 이제 성인이고, 대학에도 합격하셨다고 하셨으니까...
 
시아록:그러려나? 나중에 녹으려나..? 그럼 좋긴 하겠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이기 위해서인지 앞의 벚꽃잎벽을 헤치는 손길이 바쁘다.)
눈이 그치면.. 그러게. 그땐 몰랐는데, 지금은 평범한 게 최고인 거 같아. 나중에 그치만 대학도 가고 좀 평화롭게 생활하고 싶다. 슈슈는 어때?
 
슈테른:녹을... 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휘날려온 것처럼 바람에 사라질지도 몰라요. 이렇게 많은 벚꽃이 대체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학... 그러고보니 근처 대학에 합격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축하해요.
저도 대학에 합격했어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그래서, 앞으로 못 볼 지도 모르겠네요.
대학에 가서, 많은 사람을 사귀고, 많은 것을 배우고... 지금보다 더 자유로워지세요. (축복같은 말은 유독 작고 힘이 없다.)
 
시아록:아니면 다른 꽃까지 또 죄다 흩날려갈지도 모르지만. (너무 심각한 상황은 피하고 싶은듯 슬쩍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고마워. 슈슈도 합격한 거 축하해. 그렇게 많이 먼 대학이야? 그래도 가끔은 우리 볼 수 있지 않을까? 본가에 안 내려올 것도 아니잖아...?
어, 응. 슈슈도 대학 가면 대학생활 즐겁게 잘 해야해. 슈슈는 대학가서도 잘 할 것 같지만.
 
슈테른:...그렇게 되면 봄이 와도, 한동안 벚꽃 구경은 하지 않아도 괜찮겠죠. (말의 무게가 가볍다. 흘러가는 말인 듯)
여기서 2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있는 곳이에요. 버스로는 더 걸릴 거고... 기숙사제라서 주말에만 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왠지 애매하게 말을 맺는다)
...맞아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여기와는 다른 지역이지만 분명 대학은 즐겁겠죠.
 
그렇게 걷다 보면 채도 낮은 연분홍색 기운이 대기에 들어차더니,
 
차츰차츰 시야가 뿌옇게 됩니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요!
 
인영이라곤 한 톨도 없이, 목소리만이 메아리칩니다.
 
시아록:여기 있어! (보이지 않는 앞을 정신없이 헤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서로를 아무리 찾아도 손은 닿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시야가 트인 곳은 그나마 높은 지대입니다.
 
이곳에서 학교가 그렇게 멀지 않은지,
 
건물의 윤곽이 희미하게 눈에 띕니다.
 
그 말을 끝으로 슈테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시아록:그래, 학교에서 봐! (소리 높여 대답은 했지만, 당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는 알 수 없어졌다. 어차피 목적지는 학교고, 슈슈도 얘기했으니 얼른 학교까지 가야겠다 생각하며 좀 더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항법 또는 관찰력 판정으로 안개를 벗어나 학교로 향할 수 있습니다.
 
시아록: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8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얼마나 걸었을까요?
 
희뿌연 안개를 헤치고 도달한 이곳은 다행스럽게도 학교입니다.
 
슈테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이 지대의 건물은 전부 쌓인 벚꽃에 잠겼을 텐데,
 
오로지 학교만이 벚꽃의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앞에 그저 서 있던 당신은 기묘한 광경을 봅니다.
 
학교 건물 위로 거대한 적란운이 몸을 부풀리며
 
주위로 자잘한 구름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 구름은 익히 아는 분홍색 벚꽃을 흘리고,
 
전부 소진된 자리에는 또다시 새로운 구름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기이하게도, 거대한 적란운은 학교 내부와 이어져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달칵,
 
한 학급의 불이 켜집니다.
 
구름은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실루엣이 언뜻 비칩니다.
 
당신이 향할 곳은 분명합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나온 자리에 꽃잎들이 떨어집니다.
 
시아록:슈슈...?
(사람의 실루엣을 향해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학교에 저와 그 말고 누군가 있을리가 없지 않나.)
 
가장 높은 층 가운데 위치한 3학년 학급,
 
그곳은 당신과 슈테른의 반입니다.
 
익숙하게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학급 내에서 도로 불을 끄는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문을 열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호명한 사람과 눈이 마주칩니다.
 
아니, 눈이 마주치기 전,
 
당신은 교실 천장에 뚫린 거대한 구멍과
 
슈테른의 자리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구름부터 목격합니다.
 
시아록: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5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슈테른:...시아록.
 
슈테른은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책상 서랍 안에 손을 넣습니다.
 
당신이 대참사에 정신이 팔린 사이,
 
슈테른이 무언가 황급히 뒤로 숨겨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시아록:...어, 이게 다 뭐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슈테른:... (대답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쪽도 곤란한 얼굴)
(여전히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며 그저 뒷걸음질친다)
 
시아록:아니, 그... (뒷걸음치는 당신을 보다가 마른 손으로 한 번 얼굴을 쓸어내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어... 학교에서 시작된 거였네..?
 
슈테른:...그런... 것 같아요.
...저도 믿기 힘들지만, 어쩌면 이건... 전부 제 책임일 지도 몰라요.
하지만 믿어주세요. 저도 정말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요...
 
시아록:어, 으응.. 그야.. 네가 이런 일을 바라진 않았겠지.. 근데 진짜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학교에 와보지 않았으면 전혀 몰랐겠네..)
 
슈테른:(여전히 등 뒤로 무언가 숨긴 불편한 자세로) ...저, 상황은 제가 살피고 있을 테니까... 먼저 돌아가 계실래요.
이 일의 원인은 저한테서 비롯되었으니 제가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시아록:뭐할 건데? 이걸 어떻게 혼자 처리해.
 
돌아오는 답이 없습니다.
 
그저 이 상황을 피하고만 싶은 것 같은, 무책임한 말의 연속.
 
당신은 조금 답답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어요.
 
그것보다, 칮고 싶던 건 찾았을까요?
 
시아록:(나직하게 한숨을 쉬다가 입을 열었다.) 그, 찾고 싶은 건 찾은 거지?
 
슈테른:...네. 그러니까, 정말 이제부터는 시아록이랑은 관련 없으니까 이만...
 
뒷말은 끊깁니다.
 
교실 불이 도로 꺼진 탓에,
 
그리고 하늘이 무척이나 흐려 그 표정을 확인하기 힘듭니다.
 
그때, 아주 미미한 석양의 붉음이 교실 안으로 침범합니다.
 
가라앉는 태양이 느릿하게 안개를 걷어내며 실내를 비춥니다.
 
창밖으로 분연히 꽃이 흩날리고,
 
흐트러지듯 지는 해를 등진 채,
 
슈테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봅니다.
 
찰나의 노을에 젖어 목덜미까지 붉습니다.
 
슈테른:이렇게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뒤로 숨겼던 것은 편지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쓴 듯한 편지는
 
쓴 이의 이름만 존재하고 받는 이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시아록:어..?
 
반쯤 구긴 채 움켜쥐고 있던 편지는 초라하기까지 해서,
 
이 엉망진창인 세계를 잠시 잊게 만듭니다.
 
슈테른:......벚꽃 향이 나요. 그러니까... 이 편지가... 어쩌면 이 사태의... (말을 어물어물 잇다가도 하려다 만다. 납득시키려고 노력은 하는데, 납득은 되지 않는 상황)
 
시아록:...편지를 찾으러 온 거였어? 음.. 근데 그, 편지가 이 사태를 일으킨 거 같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물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당신을 보며 천천히 물었다.)
 
슈테른:......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광경은...... (눈이 일렁인다. 목소리가 엉망이 되고, 편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더니)
...받아주세요.
읽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이건 당신 거니까.
(그리고 무턱대고 편지를 건넨다. 눈물로 조금 젖었다)
 
시아록:(제 앞에 내밀어진 편지를 보다가, 한박자 늦게 깨달았다.) 아, 내 거구나. (깨달았다는 듯 대답하며 당신의 편지를 받았다.)
고마워. (받은 편지를 느리게 만지작거렸다.)
 
당신은 알아차립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그가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담은 결정체임을.
 
이 한 장의 가벼운 편지지에, 얼마나 많은 감정과 눈물과 세월이 담겼을까요?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연애편지에, 놀랄 새도 없습니다.
 
구름으로 이어지던 천장의 구멍에서 회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단숨에 몸이 붕 뜨고,
 
당신은 분홍색 바람에 휩쓸려 올라갑니다.
 
슈테른:시, 시아록!!
 
슈테른이 당신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지만,
 
아슬아슬하게 손끝이 스칠 뿐 당신을 붙잡지 못합니다.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뺨과 이마를 쓸고 휘날리고,
 
시야가 뒤틀립니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들어차는 향기가 달콤하고,
 
또 전신을 압박하는 감각이 괴로워서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시아록: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2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구토감이 치밉니다.
 
주마등처럼 당신의 삶이 스쳐 지나간 뒤,
 
어느 순간 뚝, 하고 세상이 암전됩니다.
 
마치 건너서는 안 되는 경계를 뛰어넘은 것처럼.
 
구분
 
구분
 
그리고,
 
당신은 낯선 천장 아래에서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킵니다.
 
마치 내동댕이쳐진 것과도 같은 충격으로 인해
 
한참이나 심장의 떨림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시아록:(벌떡 일어나 앉은 채로 귓가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듯한 심장박동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분위기상 좁지도 넓지도 않은 방 같고,
 
천장이 유독 높습니다.
 
한참이나 바르작거리고 있자,
 
아래에서 툭툭 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거, 2층 침대였습니다.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1층에서 낯선 얼굴이 튀어나와 당신을 부릅니다.
 
시아록: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쳐다보았다.)
 
???:왜,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나잖아, 한우연!
너... 과제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네 룸메도 못 알아보냐? 밤샘 작업할 때부터 혹시나 했다.
 
이름을 듣고 나면 그제야 인상착의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당신과 또래의 남자아이네요.
 
당신보다 조금 작은 체격의, 평범하게 생긴 사람.
 
안경을 껴가지고는 누가 봐도 학생 같은...
 
시아록:어, 어.. 아니.. (당황해서 눈을 굴리다가) 잠을 덜깨서... (우물우물 대답했다. 한우연...?)
 
한우연:그래, 뭐 어디 아픈 거 아니라면 됐다.
일어나기엔 좀 이른 시간인데, 더 자.
오늘 어차피 휴강이라고 공지도 올라왔더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휴걍이라는 말이며, 과제나 낯선 방과 룸메이트라는 말.
 
시아록:어, 어.. (얼떨떨하게 대답만 하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이 어딘지, 어쩐지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이 합격한 대학교도 분명 기숙사제였죠.
 
그렇다면 여기는 그 대학교의 기숙사가 아닐까요?
 
대체 갑자기 왜 여기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시아록:(갑자기 대학교라고..? 내가 원래 있던 곳은..?)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상해진 교실에 있었는데!
 
여기가 기숙사라면, 지금은 대체 몇 년도죠?
 
확인해볼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시아록:(제 침대일 게 분명한 주변을 뒤져 휴대폰을 찾아 달력을 확인한다.)
 
달력을 확인하면, 오늘은 2025년 4 6일 입니다.
 
...잠깐만요, 2025년이라고요?
 
당신이 있던 곳은 2024년 겨울인데요?
 
시아록:(내 1년.. 어디갔어. 몇 번이나 휴대폰 속 달력을 확인하지만 날짜는 편하지 않는다.)
 
설마, 편지를 받는 그 잠깐 사이에 당신의 1년이 흘러가 버린 건가요?!
 
아니,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핸드폰은 당신의 시대에 없었던 새 기종이고,
 
지갑에는 학생증 대신 대학교 출입증이 자연스레 들어있습니다.
 
악세서리는 관리를 잘 했음에도 조금 낡았군요.
 
어떠한 연유로 편지를 받는 순간...
 
1년 뒤의 미래로 날아와 버린 건 아닐까요?
 
그리고 편지에 대해 떠올리는 순간,
 
그 전후사정도 생각납니다.
 
고백 같지도 않던 고백과, 간절한 연애 편지.
 
...그걸 보냈던 상대는 지금 어떻게 된 건가요?
 
시아록:(받은 편지는 읽지도 못했고, 마지막에 뭔가..?에 휘말려서 슈슈랑은 제대로 대화도 못했고... 내 1년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도 없고.. 거기다 우리지역 벚꽃 문제는 해결되었나? 홀로 생각을 이어가며 휴대폰으로 작년 벚꽃비에 관련해 검색해본다.)
 
벚꽃 눈 사태에 대해 검색하면,
 
기사가 단 하나 뜹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벚꽃 눈이나, 당시 사태에 대한 기사,
 
하물며 SNS의 짧은 줄글조차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시아록:...? 뭐야, 하나도 없어?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마냥 몇 번을 뒤져도 기사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2024년의 벚꽃 지도나 소식은 전혀 없습니다. 이건 또 왜일까요?
 
더 찾아봐도 나오는 건 없습니다.
 
한우연:뭐 하냐? 폰 하냐? 나 심심하다.
...자냐?
 
그때 당신의 룸메이트(라던 사람)이 다시 침대를 통통 두들깁니다.
 
시아록:어? 어... 나 바빠. (지금 머리 터지겠는데다 저를 아는 것처럼 구는 상대는 자신은 처음 보는 사람이라 어떻게 대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한우연:그래? 뭐 하는진 몰라도, 날씨도 좋은데 뒹굴거리지만 말고 어디 좀 나가자.
과제는 나중에 해, 나중에~ 내가 방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시아록:나가라고?
 
한우연:네 사정이니까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네 친구 아프다고 하지 않았냐? 모처럼 이런 날에 병문안이나 가는 거지.
뭐, 나았으면 됐고.
(반응이 영 시큰둥하자 조용히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면 말고~
 
시아록:아파..? (아래 층에서 들려온 말에 의아해졌다. 누가 아프다는 거지?)
 
한우연:(황당하다는 어투로) 네 친구인데 네가 모르면 어떡해? 그래가지고 친구는 맞냐...?
뭐, SNS에서 들어보니 병원에 누가 입원했다고, 그래서 걱정된다고 엄청 심각하게 얘기해놓고선!
 
시아록:어, 어어.. 그랬지.. (그게 누군데... 당신의 말을 힌트 삼아 제 폰에서 sns 어플을 찾아켰다.)
 
지인 중 병약한 사람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대체 1년 사이에 누가?
 
당신은 다시금 핸드폰을 듭니다.
 
시아록:
자료조사
기준치: 50/25/10
굴림: 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룸메이트의 말과는 달리 그 어떤 SNS에서도 그런 소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곤란해하던 차 마침 개인 메세지 하나가 날라옵니다.
 
...슈테른?
 
설마, 당신이 아는 그 슈슈인가요?
 
메세지를 보낸 상대는 당신과 슈테른의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그가 그런 거짓말을 할 성격은 아닌데요.
 
시아록:(아픈 사람이 슈슈야..? 당황해서 폰을 만지다가 그가 입원했다는 병원이 어딘지 메시지로 물었다.)
 
그가 아프다고?
 
답장을 기다리는 1초가 1분처럼 느껴집니다.
 
잠깐의 뜸을 들이고 답장이 옵니다.
 
○○병원이라면, 여기서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립니다.
 
먼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당신도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크고 유명한 병원입니다.
 
시아록:(병원을 몇 번 확인하고 벌떡 일어나 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 나 병문안 다녀올게. (1층 침대에 있는 아마도 제 룸메이트일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한우연:어? 엉.
 
나가려면 잠옷 차림에서 옷을 갈아입어야겠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옷장을 열면 죄다 세탁 중이고,
 
양말은 죄다 짝짝이이며,
 
나가려고 신발을 신으면 얼마 전에 비가 잔뜩 왔는지 진흙 범벅입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룸메이트한테 슬쩍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요?
 
시아록:(이게 무슨 일이야. 제 옷 상태를 보다가 나직하게 숨을 쉬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 나 옷을 다 빨고 있네... 옷 좀 빌려줄 수 있어?
 
한우연:어? 뭐, 좀 끼긴 하지만 맞는 걸로 알아서 빌려 가.
갈 거면 빨리 가. 나도 나만의 시간을 좀 갖고 싶다. (아무래도 이게 본 목적이었던 듯)
 
룸메이트 몫의 옷장을 열면...
 
대부분의 옷이 몸에 맞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그는 당신보다 체구가 작으니까요.
 
그렇게 한참을 뒤적거려 맞는 옷을 찾아내면...
 
...별 모양 스프링클이 잔뜩 달려 있거나, 무지개색이거나,
 
♡교수님 깨물어부수기 리벤지♡ 같은 이상한 문구만 적혀 있는 티셔츠만 나옵니다.
 
......이거라도 입고 갈까요?
 
시아록:넌.. 옷이.. 진짜... (전혀 입지 않을 옷만 잔뜩이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우연:아, 뭐, 왜. (짜증)
 
시아록:(이런 걸 진짜 입어야 해?) 야, 이거 봐. 교수님 깨물어부수기 리벤지는 뭔데 대체?
 
한우연:그거 입고 과제하면 그 뭐냐, 전투력이 올라간다고.
기선제압용이야, 기선제압.
 
...그나마 무난한 옷을 입는다면, 멀쩡한 겉옷으로 가리고 갈 수 있겠습니다!
 
물론 벗으면 좀 패션 테러리스트가 되어버리겠지만.
 
시아록:기선제압같은 소리 하네. (저도 짜증을 내며 티셔츠를 주워입고는 제 검은 외투를 목끝까지 닫았다.)
 
아마 1년만에 만나는, 당신에게 고백했던 동창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이런 옷차림을 하고 간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당신은 어찌저찌 길을 나섭니다.
 
구분
 
구분
 
당신은 버스나 다른 교통수단으로 슈테른이 입원했다는 병원에 도착합니다.
 
슈테른이 입원했다는 병실은 11층에 있습니다.
 
이 병원은 고층일수록 중환자실이라던데,
 
상당히 위중한 환자인 걸까요.
 
전해 들은 병실의 문을 열면,
 
온통 창백한 실내의 구석에 환자용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요람 같은 침대 위에는
 
시체 같은 얼굴의 슈테른이 산소 호흡기를 끼고 누워 있습니다.
 
붕대를 온몸에 두른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합니다.
 
시아록:슈슈...? (생각지도 못한 당신의 모습에 굳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당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순간부터 침대 옆에서 다급한 신호가 울려 퍼집니다.
 
뭘 할 틈도 없이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이닥칩니다.
 
알아듣기 힘든 의학 용어와 함께 의식이 없는 슈테른을 데리고 이동합니다.
 
당신은 ‘나가 있어라.’’는 말에 밀려나 13층 로비로 쫓겨납니다.
 
1년 뒤에 나타난 당신은 슈테른에게 무엇 하나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창백한 안색이라니,
 
마치 죽은 사람처럼…
 
시아록:(날아간 1년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람.. 마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앉은 자리에서 다리를 달달 떨며 기다렸다.)
 
슈테른:저, 잠시만 비켜주실래요?
 
환자복을 입은 슈테른이 당신을 밀어내고 자판기에서 오렌지 주스를 뽑아갑니다.
 
캔을 따고 들이키는 모습이 더없이 건강합니다.
 
시아록:슈슈?
어, 괜찮아?!
(당신의 팔을 붙잡고 급하게 외쳤다.)
 
방금 실려간 게 아니었나요?!
 
당신이 그를 붙잡자 제대로 당신의 얼굴을 본 그도 놀랍니다.
 
슈테른:시, 시아록...?! 다, 당신이 어쩐 일로 여기...
아, 전 괜찮아요. 그...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시아록:그치만 너 아까전에..! (아까의 심각한 상황을 떠올리며 되묻는다.)
진짜 심각해서 막 의사들이랑 가고 그랬는데
 
슈테른:네...? (정말 의아하다는 투로) 아, 방금 옆 호실 환자분이 실려가시긴 했죠.
저보다 그 분이 더 위급하세요. 괜찮으셔야 할 텐데...
 
아무래도 호실을 잘못 찾았었나 봅니다.
 
시아록:(당신이 멀쩡한 걸 눈으로 보이니 안도감이 들었다. 아까는 제가 너무 당황해서 잘못 본 모양이었다.)
 
이런, 착각할 게 따로 있지!
 
시아록도 참 덜렁이라니까~
 
시아록:(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디가 아파? 언제쯤 퇴원하는데?
 
슈테른:(언제 퇴원하냐는 말에 눈에 띄게 곤란한 표정이 된다) 심각하진 않지만, 이야기가 조금 길어요...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그는 음료수를 뽑으려는 듯 자판기를 향해 다시 걸어갑니다.
 
시아록:으응.. (네 뒤를 졸졸 따라 움직였다.)
 
한 발짝 내디딘 슈테른은
 
갑자기 가슴께를 부여잡고 주저앉습니다.
 
폐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혹은 괴한에게 날카로운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갑작스러운 발작에 또 다른 의료진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슈테른의 양팔을 붙잡고 진정시킵니다.
 
그러나, 이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은 듯
 
슈테른은 당신의 옷자락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입을 엽니다.
 
시아록:(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눈만 깜빡이다가 처치를 하는 의료진 사이로 네 앞에 쪼그려앉았다.)
나 어디 안 가. 여기 있을 거야. 치료부터 받자.
 
슈테른:(고개를 힘겹게 끄덕이고) 제... 병실의 옷장을, 열어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슈테른은 피 기침을 뱉으며 앞으로 고꾸라집니다.
 
의료진이 슈테른을 들것에 실어 데려갑니다.
 
이번에는 진짜입니다.
 
...
 
다시 황망하게 남겨졌습니다.
 
시아록:(제게서 멀어지는 당신을 멀거니 보며 멍청하게 서있다가 그렇게 힘겨워하면서 자신에게 얘기한 슈슈의 이야기는 지켜야할 것 같아서 먼저 병실의 옷장에 갔다가 당신에게 가기로 했다.)
 
그의 말을 들어주고 싶어요.
 
당신은 슈테른의 병실을 제대로 찾아 들어갑니다.
 
아까 들어간 병실과 똑같은 구조이지만,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릅니다.
 
친구들이 다녀간 듯 다양한 편지와 선물,
 
장식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당신이 이제야 찾아온 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가 지시한 대로 옷장 문을 열면,
 
입원 당시 입고 온 듯한 외투가 걸려있습니다.
 
오른쪽 구석에 놓인 작은 상자가 시선을 잡아끕니다.
 
시아록:(대학 와서 친구들이랑 잘 지냈나보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옷장에서 발견한 상자를 꺼내들었다.) 이건가?
 
상자 안에는 다이어리가 있습니다.
 
그의 입원 경과를 기록한 일지 같네요.
 
약 1년간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적어둔 것 같습니다.
 
기록을 나눠 보자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시아록:(...읽어도 되나, ...개인적인 거 같은데.. 우물쭈물거리다가 얘기해준 건 읽어도 된다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차례대로 엑스레이 사진부터 확인했다.)
 
슈테른의 상반신이 찍힌 엑스레이입니다.
 
심장 부근의 중심부터 신체 말단까지
 
검고 딱딱한 가닥이 촘촘하게 뻗어져 나간 이상한 사진입니다.
 
뭔지는 몰라도 이상하네요...
 
더 자세하게 살펴보려면 관찰력 판정합니다.
 
시아록:
관찰력
기준치: 90/45/18
굴림: 3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거, 자세히 보니 나무뿌리나 나뭇가지 같은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몸속에 나무 같은 식물이 자란 것 같습니다.
 
괴이한 일에 이성 판정합니다.
 
시아록:
SAN Roll
기준치: 69/34/13
굴림: 5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런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던가요?
 
시아록:... 이게 뭐지..? (엑스레이사진을 미간을 찌푸린 채로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대략적인 증상이 적힌 검사지를 꺼내들었다.)
 
검사지도 있지만, 주로 그의 글씨로 적힌 개인적인 기록이 더 많습니다.
 
내용을 읽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졸업식 이후, 슈테른은 당신과 멀리 떨어진 지역의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뚜렷한 증상은 입학 무렵부터 시작했습니다.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것만 제외하면 일상생활이 어렵진 않았기 때문에,
 
가볍게 넘기다 4월 초에 각혈하며 심각성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슈테른은 이 전례 없는 희소병을 치료하고자
 
해외에서 종양으로 추정되는 조직 세포를 걷어내는 대수술을 치렀습니다.
 
그런데도, 맨눈으로 구별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한 세포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나뭇가지 같은 가닥들은 끊임없이 재생했습니다.
 
몇 번이나 수술해도 결과는 같았습니다.
 
결국, 슈테른은 치료를 포기하고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 입원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단락의 끝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시아록: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아까 심하지 않다고 했잖아?! (버럭 소리를 올렸다가 병원이라는 걸 깨닫고 급하게 입을 닫았다.) 근데 뭘.. 누구한테 전해줘? (그의 글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결국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확인했다.)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과 표지 사이에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찍었던 다양한 사진들이 끼어 있습니다.
 
대여섯 장 정도 넘기면,
 
...당신의 사진 역시 있습니다.
 
창문에 반쯤 기댄 채 밖을 바라보는 당신,
 
노을이 지는 시간대인지 빛이 유독 강하고 따스합니다.
 
햇빛을 받는 얼굴은 흡사 혼자서도 빛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진 한 장에서 찍은 사람의 애정이 느껴집니다.
 
자신의 얼굴이라기에도 낯설 만큼, 예쁘게 찍혔으니까요.
 
찍은 기억은 모호하지만, 언뜻 그가 허락을 구했던 기억은 같이 떠오릅니다.
 
시아록:....이렇게 찍혔던가..? (애정이 묻어나는 제 사진을 한참 둘러보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느릿하게 호흡을 하고 다시 정리해서 상자에 모두 집어넣어 옷장 안의 제자리에 넣었다. 이제 너를 찾아갈 시간이다. 아까의 상황을 보면 의료진이 대화를 할 수 있게 해줄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당신이 한동안 생활했을 병원의 침실을 손으로 한 번 쓸어보고는 나와서 의료진에게 당신의 행방을 물었다.)
 
다이어리를 전부 다 살펴보고 나면, 병실 창문 밖은 새까만 밤입니다.
 
검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집니다.
 
간호사에게 상태를 물으면 좋지 않은 표정으로 밝은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당신을 어딘가로 안내해줍니다.
 
시아록:(그 짧은 시간에 수술에 들어갔구나, 또... 어쩐지 울적해진 기분으로 안내받은 곳의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으면, 바로 옆 벽에 창문이 있습니다.
 
숨도 돌릴 겸 바깥을 바라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병원의 정원은
 
나무 하나 없이 황량하기만 합니다.
 
보는 환자들의 기분까지 우울하게 만들 정도로요.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곧 수술실의 문이 열리고 그가 들것에 실려 나옵니다.
 
의사로 보이는 사람이 담담히 얘기합니다.
 
병실로 돌아가, 누워있는 그를 봅니다.
 
다이어리를 본 뒤의 감상은 또 달라서,
 
그가 금방이라도 흩어져버릴 것 같은 꽃잎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몇 번이나 이런 수술을 거쳤을까요?
 
시아록:(침대 옆에 서서 가만히 내려보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네 이마를 손끝으로 차분히 쓸어넘겼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의료진의 것은 아닌 듯해요.
 
이런 시간에 누구지?
 
시아록:(뒤를 돌아본다. 슈슈와 아는 사람인가?)
 
구분
 
구분
 
돌아보면,
 
문가에 대충 가방을 걸친 고등학생이 서 있습니다.
 
머리를 단정하게 기른 학생은 근처 여고의 교복을 입고 있습니다.
 
명찰에는 ‘이보미’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보미:원래 이 병원의 정원은 이렇게 흉한 몰골이 아니었어요.
 
대뜸 당신에게 말을 건 학생은
 
화병에 꽂힌 분홍색 리시안셔스를 꺾어 듭니다.
 
그러고는 검지와 중지에 꽃을 끼운 채 한참 흔들거립니다.
 
이보미:조금 따뜻해지면 벚꽃이 만개해서 화사한 분위기였는데, 안타깝게도 작년에 벚꽃이 멸종해 버렸죠.
 
시아록:멸종했다고요? 아니, 그 전에 누구세요?
(갑작스런 말에 당황했다.)
 
이보미:이보미, 평범한 학생입니다~
믿기 힘드시면 검색해 보세요.
 
시아록:평범한 학생을 왜 검색해요..
 
이보미:저 말고 벚꽃 멸종이요. (귀엽다는 듯한 얼굴로 웃는다.)
 
그는 옆 병원침대 옆 간이 의자에 앉아 발을 까딱입니다.
 
뭐죠, 이 사람...
 
시아록:..슈슈랑 아는 사이에요?
 
이보미:아뇨. 하지만 그가 병에 왜 걸렸는지는 알고 있어요.
얘기하자면 긴데~ 우선 당신에게 사전 지식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시아록:슈슈가 왜 병에 걸렸는지 안다고요?! 어떻게?
 
이보미:어떻게,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네요. 그냥 아는데요.
알려줄 테니까, 진정해 보세요.
 
혹시 벚꽃 멸종과 슈슈의 병은 관계가 있는 걸까요?
 
그 전에, 벚꽃이 멸종했다니?
 
시아록:....그래요. (너무 흥분했나보다.) 벚꽃 멸종은.. 뭔데요?
 
이보미:작년 1월 7일을 기점으로 전 세계에 있던 모든 벚나무의 꽃잎이 사라졌어요.
꽃잎 하나하나가 나비라도 된 것처럼, 나풀나풀 하늘로 올라가다 증발해 버린 거죠.
꽃잎이 전부 사라진 뒤에는 나무들이 썩어 문드러져 흙으로 돌아갔다고 해요.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시아록:
SAN Roll
기준치: 68/34/13
굴림: 1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얘기를 대충 받아들인 당신은 깨닫습니다.
 
작년 1월 7일은 우리의 졸업식이었다는 걸.
 
시아록:(그때쯤엔.... 벚꽃눈이 계속 쏟아지지 않았나....?)
 
아무래도 이곳엔 벚꽃 눈이 계속 쏟아지긴커녕
 
벚꽃의 씨가 모두 말라버린 모양입니다.
 
이보미:사라진 벚꽃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는 웃으면서 등을 돌립니다.
 
그리고 이제는 빈 또 하나의 침대에서 짐을 정리합니다.
 
그의 병문안 상대는 이제 병실을 비웠나 봐요.
 
퇴원을 했거나, 아니면...
 
이보미:저는 답을 알아요.
사라진 모든 벚나무는 슈테른 안에 있어요.
 
시아록:뭐?
 
이보미:가엾게도 그게 벚나무의 저주니까.
 
시아록:그걸 왜 슈슈가 받는데? 그런 걸 왜 알고있는데?
 
당신이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제 가방에 몇 안 되는 소지품을 쓸어 담던 이보미는
 
가방을 닫은 뒤 경쾌하게 돌아봅니다.
 
이보미:이 침대의 주인이 벚꽃을 좋아했거든요. 그러니까 조금만 도와줄게요.
 
그는 목을 큼큼, 가다듬더니 설명을 시작합니다.
 
이보미:슈테른은 몇 년 전 벚나무의 저주에 걸렸어요. 지금의 병증은 그게 구체화 된 것이죠.

핸드아웃: 벚나무의 저주

 

차토구아의 행성에는 ‘저주받은 벚나무’가 있다. 종종 여러 행성을 산책하는 그에게서 벚나무 씨앗이 떨어지기도 한다. 지구에 정착한 저주받은 벚나무는 반경 1km 내에서 숙주를 찾는다.

숙주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그리고 격렬한 감정에 휘말렸을수록 좋다. 이를테면, 삭막한 인생에 찾아온 첫사랑의 시작이라거나.

벚나무의 저주는 그 마음에 기생하며, 3년 내로 자신의 숙주 안에 모든 하위 종족의 씨를 불러들여 심는다. 숙주를 재료 삼아 다시 태어난 벚나무는 또 다른 저주를 퍼뜨린다. 이 나무의 물리적 제거는 불가능하다.


 
시아록:(가만히 설명해주는 학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데..?
 
이보미:놀랍지 않나요? 과거로 꽃잎들이 전부 새어버렸단 건요. (당신이 아는 얘기가 아니냔 듯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뭐, 그야 그 자리에 그런 것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시아록:(당신의 시선에 움찔했으나 입을 열진 않았다.)
 
그리고 이네 이보미가 밟고 선 바닥에서 새하얀 선이 그어지더니,
 
곧 사람 하나가 드나들 수 있는 크기의 구멍과 계단이 생깁니다.
 
이보미:이곳으로 가면 저주에 걸리기 직전의 시간으로 갈 수 있어요.
과거를 너무 바꾸려 들진 마세요. 다시 여기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 간단해요. 내려가서 그 사람이 당신에게 반하는 순간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면 되는 거니까.
당신 좋다는 사람 차본 적 있어요?
 
시아록:어..?
 
이보미:그러면 돼요. 쉽죠?
 
시아록:.... 반하지 못하게 하라는 거야...? 아니면.. 그... (잠시 어물거리다가) 차라는 .... 거야?
 
이보미:둘 다 하면 더 좋죠. 최소한 관심도 못 생기게 하세요.
격렬한 감정이라는 양분이 없으면 저주가 새어들거나 자랄 틈도 없어질 걸요.
그래서, 하실 거죠?
 
시아록:.... 할게. (아직 그때 받은 러브레터는 읽지도 못했고, 그래서 제대로 대답도 못해 줬지만... 슈슈가 살아있는 게 더 중요니까.)
 
명쾌한 대답에 이보미가 활짝 웃습니다.
 
이보미:좋아요. 인간의 무모한 모습은 언제 봐도 재미있다니까요.
 
당신은 그의 웃음을 뒤로하고 계단을 내려갑니다.
 
구분
 
구분
 
계단을 조금씩 조금씩 내려가자,
 
뒤에서부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아스라이 흐려지는 풍경을 지나 한참을 걷습니다.
 
마지막 계단을 걸어 내려간 순간,
 
당신은 계단과 복도의 경계에 서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어수선한 소음, 왁자지껄한 소리,
 
바로 한 달 전만 해도 평화롭게 다니던 당신의 모교입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은 좀 더 과거로 돌아온 것 같네요.
 
복도의 거울에 조금은 앳된 모습의 당신이 비칩니다.
 
핸드폰은 아주 구닥다리 기종으로 변해 있고,
 
학생증은 갓 받은 듯새것 같으며,
 
악세서리는 아직 착용하고 다니기 전인 듯 아예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입학하고 얼마 안 된 시점 같아요.
 
시아록:(이야기를 듣고 움직인 것이건만 또다시 갑작스레 바뀐 환경에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자신의 것을 이리저리 꺼내 확인하고서야 정말로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 모든 걸 없던 일로 만들라니.... 한숨만 절로 나오는데, 결국은 네 목숨이 달린 일이어서 어떻게든 해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차 버리라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그를 만나야 뭐라도 할 것 아닙니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머뭇거리던 당신의 뇌리에
 
문득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입학 전, 벼락을 맞고 쓰러진 교목을 대체하기 위해
 
학교가 멀리서 큰 벚나무를 공수해 와 대공사를 벌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분명 뒤뜰이었죠.
 
시아록:(잠시간 우왕좌왕하다 떠오른 뒤뜰 생각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제가 처한 상황은 한숨만 나올 뿐이고, 자연스레 발걸음은 더더욱 무거워져서 한걸음 떼는 것도 힘겨웠지만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공사가 끝난 시기인지, 흙먼지나 포크레인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학생이 한 명 서 있습니다.
 
기억 속보다 약간 더 작고, 교복이 조금 헐렁합니다.
 
만발한 벚꽃 속에 서서 한참 나무를 올려보던 그는
 
인기척을 느낀 듯 천천히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슈테른:...시아록 씨?
 
당신을 바라보는 슈테른의 표정에는 미약한 열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전부터 호감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 왜?
 
며칠 전에 함께 청소해서?
 
같이 하교를 해서?
 
숙제를 도와줘서?
 
혹은, 입학식 때 옆자리에 앉아서?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첫사랑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면,
 
우리가 두꺼운 청춘의 첫 페이지를 함께 열어버린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 이 마음을 지우는 데 한 점의 미련도 없나요?
 
시아록:(당신의 얼굴에서 뚜렷하게 자신을 향한 호감을 발견하고서 결국 그 자리에 멈춰서서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제 미간을 문질렀다. 눈가에 열이 올랐다. 둔해빠져선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몰랐던 주제에, 이제야 알아챈 주제에... 네 목숨이 달린 일인데도, 그 애정이 너무 ... 너무 아까워서. 분명 가진 적도 없었는데, 갑작스레 무언갈 빼앗긴 아이처럼 울고 싶어졌다. 목이 메여 마른 입을 몇 번 달싹이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만 했다.) ...응.
 
이제야 만났는데, 이제야 알아차렸는데,
 
기필코 그것을 부술 수 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아챕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마음이 쏟아지면, 문득 깨닫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원래 슈테른에게 돌려줄 물건이 있었습니다.
 
주머니 안에 얼마 전에 주운 그의 노트가 만져집니다.
 
시아록:(몇 번의 호흡 끝에 주머니에서 당신의 노트를 꺼냈다.)
그, 내가 이거... 주웠는데... 네 거지?
 
슈테른:...이건... (당신이 건네는 것을 살핀다) 네, 분명 제 거에요...! 어디서 발견하셨나요?
마침 잃어버려서 무척 곤란해하고 있었거든요. 소중한 노트에요...
 
시아록:그래, 다행이네. (대답을 하고선 저를 가다듬으려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여전히 제 감정은 들쑥날쑥거렸다.)
 
이대로 그냥 노트를 건네주나요?
 
시아록:주웠는데 누구건지 알아본다고 내가... 그 안을 봤는데, 미안해.. (개인적인 노트였던 것일 수도 있으니 멋쩍게 당신에게 사과를 건네며 자연스럽게 노트의 내용을 떠올렸다. 따지자면 자신에겐 몇 년 전의 일일 텐데... 어제의 일마냥 떠오르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내용은 정말 그 나이대 또래가 쓸 만한 내용 뿐이었습니다.
 
특히 병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던 걸로 보아 건강했나 보네요.
 
아무래도 학생이 해준 말은 정말이었나 봅니다.
 
벚꽃을 보러 가고 싶다거나, 시험 공부에 집중이 잘 안 된다거나.
 
장래희망은 어떻게 되고, 졸업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
 
...마지막으로 당신이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짧은 문장까지.
 
슈테른:... 괘, 괜찮아요. (식은땀을 흘리며) 혹시 어디까지 보셨나요?
 
시아록:어.... (보다보니까 거의 다 봐버렸다고 하면... 우물쭈물, 눈이 데구르르 굴렀다.) 조, 조금..? 봤어...
 
여기까지 얘기한 건 좋은데... 어떻게 답하죠?
 
시아록: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그의 낯이 안 좋은 걸로 보아,
 
아무래도 그가 지금 당신에게 고백을 할 작정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차 버리라는 말은 호감을 떨어트리라는 말인 걸까요?
 
어떻게든 그가 좋아할 틈도 주지 못하게끔 해야 할 것 같아요.
 
슈테른:그... 그렇군요. 그래도 주인을 찾아주시려고 한 건 감사해요. 역시 친절하시네요...
1년동안 같은 반일 텐데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시아록:어, 그.... 그러게... (아니, 이걸 어떻게 대체 거절하고 차라는 거야...!! 진심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머리 위에서 벚나무가 흔들립니다.
 
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힘없이 떨어집니다.
 
당신이 구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할 사람은 이 사람이 아닙니다.
 
곧 져버리고 말 현재의 슈테른입니다.
 
시아록:(그냥 제가 세상에 어떤 잘못이라도 크게 저질러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근데 대체 뭘 얼마큼 잘못했길래 저한테 이런 시련이 온단 말인가... 제 혀 끝을 잘근잘근 씹어대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전혀 원치 않는 말들을 칼날처럼 입에 물자니 목 안이 뜨거웠다. 제가 내뱉을 말에 분명 저도 너도 함께 상처받으리라. 동시에 상처입힐 칼자루 없는 칼을 쥐고서 걱정부터 앞섰다. 그 상처가 내 것보다 네 것이 더 크면 어쩌지, 제 입술을 한 번 물었다가 눈도 질끈 한 번 깜았다가 떴다.)
그, 있잖아. 같은 반이 될 건데... 그...
(제 눈가가 화끈해졌다. 겨우 입을 뗐을 뿐인데, 벌써 상처를 입었다. 근데 이 상처가 나한테만 향했으면 좋겠어.)
앞으로......, 앞으로, 있잖아... 같이 못 어울릴 거 같아.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냥, 그..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 너한텐 더 좋은 사람도 생길 거야. 분명.
(저를 상처입히는 제 말에 소리 높여 울고 싶어진만큼 제 숨을 죽였다. 제 칼 끝이 당신을 얼마나 상처입힐지 몰라서 당신의 얼굴에서 제 눈이 떨어지지 못했다.)
 
슈테른: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 어디 이사라도 가시는 거에요?
그럼 왜 그렇게... 미안해하는 얼굴이세요.
 
시아록:.... 그냥, 정말 미안한데... 그...
(아, 이걸 내 입으로 뱉어야 한다는 게. 내뱉고 나면 아마도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게 끝없이 사무쳤다.)
나에 대한 마음... 접어줄래?
(네가 본 미안하게 보이는 내 얼굴이, 네 마음을 못받아줘서 미안하다고 착각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살아서 나중에 언젠가 떠올렸을 때 그냥 그런 나쁜 놈이 있었지, 하고 누군가에게 가벼운 얘기로 입에 올렸다가 털어버리는 이야기가 되면 좋겠어. 내가 너에게 큰 상처로 안 남았으면 좋겠어.)
 
당신은 똑똑히 봅니다.
 
그의 벚꽃 색으로 물들었던 얼굴이
 
천천히 사그라들어, 희게 색이 바래고,
 
고개가 맥없이 꺾이는 것을.
 
어떤 마음이 시작되기도 전에 싹을 밟습니다.
 
단지 그것뿐인데, 이렇게나 가슴이 아픈 건 어째서일까요.
 
...
 
구분
 
구분
 
벚나무 아래에는 잠시간의 정적이 감돕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던 그때,
 
누군가가 입을 떼기도 전,
 
당신은 벚나무의 뿌리에서부터 땅을 뒤흔드는 묵직한 진동을 느낍니다.
 
그와 동시에 슈테른이 심한 통증을 느끼는 듯,
 
그 자리에서 가슴께를 부여잡고 주저앉습니다.
 
이렇게까지 그의 마음을 꺾었다면,
 
병도 같이 나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당황하던 차, 머리를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보미:저예요. 상황이 급변한 것 같네요. 이 목소리는 당신한테만 들리니까 대답하지 마세요.
 
시아록:(당황해선 주저앉은 당신을 붙들다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미:아무래도 벚나무는 이 먹잇감을 어떻게 해서든 놓치고 싶지 않나 봐요. 나는 이 모습일 때 힘이 많이 약해져서 해결할 수 없는데, 마침 당신은 ‘그것’을 갖고 있잖아요?
지금부터 ‘그것’, 그러니까 시간 여행용 토템의 의 힘을 빌려서 시간을 거스를게요.
슈테른의 마음에 직접 간섭하기 시작한 지금이야말로 벚나무의 망령을 완전히 없앨 유일한 기회예요.
다만 하나의 상황마다 아주 짧은 시간밖에 머무르지 못해요. 방금처럼 여유 부리지 못하니까 빨리 끝내주세요.
 
잠깐, 뭘 끝내라는 건가요?
 
정말로 다급한 듯,
 
이보미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립니다.
 
그와 동시에 당신을 구성한 세계가 크게 뒤틀리더니,
 
주머니가 아주 뜨거워집니다.
 
편지가 있는 쪽의 주머니입니다.
 
순식간에 장소와 시간이 변합니다.
 
그제야 당신은 깨닫습니다.
 
슈테른과 일체가 된 벚나무의 망령을 없앤다는 것은,
 
곧 슈테른의 마음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슈테른과 쌓았던 모든 추억을
 
당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부숴야 합니다!
 
...
 
청소 시간입니다,
 
눈앞의 슈테른은 대걸레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슈테른:아... 저, 괜찮으시면 일으켜 주실래요?
 
슈테른은 당신의 손을 요청합니다.
 
시아록:(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이를 악무는 걸로 치환하고는 못 들은 척 빠르게 지나쳤다. 떨어진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 손을 거절하면,
 
달려나오는 문틈으로'
 
다른 아이가 슈테른의 손을 잡아주는 게 보입니다.
 
창밖에 있던 벚꽃의 강렬한 분홍색이 희미해집니다.
 
그 순간, 세계는 재구성되어,
 
배경은 하교하는 길입니다.
 
슈테른:저희 집은 이쪽이에요. 혹시 어느 쪽으로 가세요?
 
슈테른은 당신의 집과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당신은 같이 돌아가나요?
 
시아록:(당신과 같은 방향임에도 한참을 빙 둘러 가야할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아, 난 저쪽이라서...
(그래도 널 민망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서 입꼬리를 올리고 싶었는데, 제대로 표정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거절하면 슈테른은 버스 정류장에 혼자 남습니다.
 
슈테른:그러시군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때, 조금 전에 슈테른의 손을 잡아준 아이가 옆으로 옵니다.
 
두 사람은 즐거운 듯 이야기를 나눕니다.
 
슈테른은 문득 당신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봅니다.
 
벚나무의 꽃잎을 물들인 색이 한층 더 옅어집니다.
 
세계가 변합니다.
 
도서관에 나란히 앉아 숙제하던 슈테른은 당신에게 묻습니다.
 
슈테른:저, 이 문제는 이렇게 푸는 게 맞나요?
 
시아록:... 나도 잘 모르겠네.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야겠다.
(네가 보여준 문제를 보는 듯 마는 듯 하며 목소리를 겨우 짜내어 대답했다.)
 
슈테른:아, 그럼 같이 풀까요? 서로 모르는 문제면 가르쳐줄 수도 있으니까...
아, 시, 싫으시면 괜찮아요.
 
시아록:내가, ...잘 몰라서... 너한테 도움 안 될 거야.
(울음을 삭히니 차게 식은 목소리가 나왔다. 신기하지..)
 
당신이 자아낸 차가운 말투는 도서관 전체를 정적으로 만듭니다.
 
옆에 앉아있었을 게 분명한 그와의 사이가 무한히 멀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창밖의 벚나무는 이제 거의 색이 빠져 있습니다.
 
도서관이 산산이 부서짐과 동시에,
 
새로운 건물이 천장부터 세워집니다.
 
눈부신 조명, 지루한 연설,
 
장소는 강당입니다.
 
마침내 시간은 입학식까지 거슬러 올라옵니다.
 
슈테른:저, 옆에 앉아도 괜찮을까요?
 
당신의 옆에 슈테른이 앉습니다.
 
창가 바로 옆에 앉은 두 사람은 몸에 맞지 않는 교복을 입고 있습니다.
 
여태 봤던 그 어느 때보다 앳된 표정으로, 슈테른이 손을 내밉니다.
 
슈테른:저는, 그, 프루헤 슈테른이라고 하는데... 편하게 불러주셔도 괜찮고...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
 
당신은 정말 많은 순간을 부숴왔습니다.
 
그러니 확신합니다.
 
이 순간을 부순다면, 우리는 친구조차 되지 못 하리라는 것을.
 
시아록:(너에게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색바랜 벚나무가 흐리게 아른거렸다. 여기서까지 거절하면 너와 나는 아마 평생 마주치지 않을 평행선 위에 서게 되리라는 걸 깨닫는다. 그 많은 시간을 부수어왔는데, 이것조차 부숴야해? 이미.. 그 시간들로 너에게 나는 끔찍한 사람이 되어 있을 텐데... 이 시간조차 잘근잘근 밟아야 하나. 망할 벚나무... 아마 저는 평생 벚나무도 벚꽃도 버찌도 싫어질 것이다. 벚꽃이 흩날리는 땐 집 밖에 나가기도 싫을 것이고, 제 발 밑에 뭉그러질 버찌도 끔찍해할 것이며, 벚나무가 보이지 않을 곳에서 살 것이다.)
...시아록. 근데, 미안. 친해지긴 어렵겠다. 슈테른.
(그런데 제 하찮은 감정보다 네가 살아갈 미래가 더 소중해서 결국 너와의 단절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내 이름 한 글자는 너한테 알려주고 싶은 욕심을 저버리지 못해서... 아, 알량하다. 정말. 결국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앉은 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껏 참은 탓에 끝내 나올 것 같은 눈물은 터지지 못했지만...)
 
당신은 대답합니다.
 
그와 동시에,
 
창밖에 선 벚나무는 가지부터 줄기,
 
그리고 꽃잎 하나까지 새하얗게 변모합니다.
 
창밖으로 하얀 눈이 흩날립니다.
 
아니, 이것은 벚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슈테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가장 처음의 순간은 약간 당겨져 등교하는 길을 비춥니다.
 
당신의 앞으로 친구들이 웃고 떠들며 지나갑니다.
 
그들은 지각한 슈테른과 전화 중입니다.
 
이제부터 일어날 일을 당신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입학식에 지각한 슈테른은 당신의 옆자리에 앉아 인사를 청했다 면박을 당하고,
 
같은 반이 된 뒤 숙제를 도와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겠죠.
 
하교도 같이 못 하고,
 
청소하다 넘어져도 당신이 슈테른을 일으켜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새하얗게 바랜 벚나무 앞에 섭니다.
 
바람에 따라 힘없이 흐늘거리는 가지에서 원념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머니의 편지는 여전히 뜨겁습니다.
 
꺼내면, 편지의 뒷면에는 못 보던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슈테른이 당신을 좋아했다는 유일한 증거.
 
그 증거는 마지막 확인 사살을 당신에게 요구합니다.
 
종이를 찢는 동작은
 
여태 슈테른을 구하기 위해 당신이 한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쉽습니다.
 
손목을 비틀고,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면
 
몇 차례 찢지 않아도 금방 산산이 조각날 것입니다.
 
바람이 한 번 불기만 해도 꺾일 것처럼 힘없는 벚나무는
 
그것으로 다시는 저주를 흩뿌리지 못하고 부러지겠죠.
 
이 편지가 유난히 낡은 이유를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1학년 때부터 작성을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슈테른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편지를 썼는지,
 
어째서 여태 전달하지 못한 건지,
 
그 이유를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몇 번이고 고쳐 쓴 끝에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진 편지를,
 
당신은 쉽게 찢을 수 있나요?
 
벚나무가 위기를 느껴 환영을 보여주는 건지,
 
혹은 이 편지의 다른 마법적 효과인지 알 수 없지만,
 
벚나무 위에는 슈테른이 앉아 있습니다.
 
당신을 알아보고 웃으며 내려오는 그 모습은,
 
분명히 당신이 아는 그 슈테른입니다.
 
어쩌면 환영, 어쩌면 인형일지도 모르지만,
 
슈테른:...받아주세요. (뭘 받아달라는 건지, 이제 그 마음은 형체조차 없는데.)
 
시아록:아... 진짜, 끝까지....
(삼키고 삼켜낸 울음 끝에는 어째서인지 버석함만 남았다. 메마른 건조한 목소리에 짜증이 서렸다.)
 
슈테른:읽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그건 당신 거니까.
 
슈테른은 당신이 긴 시간 여행을 떠나기 전처럼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어느덧 배경은 노을 진 교실입니다.
 
시아록:정말 읽고 싶은데.... 난 아마 이걸 읽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모든 걸 다 잃어버리고, 평생을 가지지 못하고... 느릿하게 너에게 대답했다)
 
슈테른:(커튼이 흩날리고, 가렸다 비춰졌다를 반복하는 햇빛이 별빛처럼 아득히 깜빡인다. 열린 창밖으로 흰 벚꽃이 들어온다. 이미 수줍은 분홍빛 따위는 없어져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벚꽃이다. 흩날리는 꽃잎 하나를 집어들고) 창 밖의 저 벚나무, 저 아래서 우리 많은 시간을 보냈었죠.
시험 문제를 맞춰보고, 가끔은 같이 점심도 먹고, 의자에 기대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사실은 당신이 없을 때 떨어지는 꽃잎을 잡아보려는 시도를 했어요. 무수하게... 그야,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처,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누가 그랬으니까.
따, 딱히 그걸 믿은 건 아니에요. 그냥...... (더 말하기 힘든 표정이다. 애매하게 단락이 끊긴다)
 
시아록:... 그래서 벚꽃잎은 잡았어?
(가만히 네 말을 듣다가 물었다.)
 
슈테른:잡는 데 성공했던가요... 이제 그것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당신이 어째서 저를 내치려는 건지 저는 알지 못해요. (벚꽃의 망령으로서 말하는 건지, 그로서 말하는 건지 모호해진 목소리로) 그렇지만...
(해가 땅끝에 걸려, 노을의 절정이다. 눈부신 햇빛이 그의 피부 가장자리에 스며들어 얼굴을 붉게 빛낸다. 곧 밤이 찾아들고 이 마법도 끝나 버리겠지만.) ...전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그런 선택지, 저한테는 없었으니까...
 
시아록:이유도 모르고 나에게 그런 일을 당했으면 원망해야하지 않을까?
(당신을 보며 흐리게 웃었다.)
 
슈테른:그 과정에서 당신은 저만큼 저에 대해서 생각했겠죠. 이유 없는 악의라는 건, 당신은 갖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좋아했어요.
 
시아록:내가 그렇게 행동했는데 어떻게 좋아한다는 소리가 나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내가 한 행동 모두 너에겐 상처였을 텐데. 변명하자면 할 수 있는 말은 수만가지지만, 결국 선택해서 저지른 건 내 의지였다. 그게 네 미래를 위한 행위라 해도 비난받을 마땅한 일이었다.)
 
슈테른:당신이 그 편지를 받고, 어떻게 반응할지 수백 번, 수천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어요.
자기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 부드럽게 거절할까,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며 멀어질까, 그냥 친구로 남자고 좋게좋게 말할까, 그것도 아니면 저를 피해다닐까, 원망할까...
......무슨 반응이 돌아왔어도, 당신은 제 편지를 받았어요. 그걸로 만족해요. 원망같은 거, 하려고 해도 마음먹어지지가 않아요.
좋아한다는 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쉰다. 거의 벚꽃잎이 다 떨어진 창 밖 나무를 바라본다. 무너져가는 우리의 추억을.) 그런 거에요.
 
시아록:... 근데 난 이것조차 못 남길 거래.
(너의 그 모든 말을 듣고서 겨우 입 밖으로 내어 한다는 소리가 투정이었다. 아, 난 이게 정말 갖고 싶었나봐. 이 편지에 네 마음이 꾹꾹 눌러담겨있다는 게 정말 좋았나봐.)
...내가 지금 읽어봐도 돼?
(그럼, 내 기억에라도 남기면 안 될까. 이미 바꾼 과거 때문에 내 기억에도 남지 않을까봐 겁나지만, 그래도...)
 
슈테른:읽어봐도 괜찮지만... 내용은 없을 거에요.
당신이 부쉈으니까. (사실 그대로의 담담한 말. 당신에게는 이것조차 상처겠지만...)
그러니까 기억해 주세요. 그 편지는... 프, 프루헤 슈테른이, 시아록에게, 좋아한다고 쓴 편지는......
여기에 있었어요.
 
시아록:그런가.. 받자마자 읽어볼 걸 그랬나봐. ...그래, 기억할게.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슈테른:그럼 됐어요. 저는 이제 만족해요.
...정말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당신이 울고 있었던가요?
 
시야가 지나치게 흐려, 상대의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두 눈으로도 그가 다가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습니다.
 
벚꽃이 내리는 것과 같은 속도로, 천천히 한 걸음, 두 걸음,
 
당신에게 가까워진 그는,
 
이내 한 방울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곧 수백만 장의 꽃잎으로 흩날려 사라집니다.
 
...
 
이로서 당신을 좋아했던 '프루헤 슈테른'의 종말입니다.
 
당신의 손에 남은 것은, 이제 오로지 편지 한 장밖에 없습니다.
 
시아록:아, 진짜... 진짜 억울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채로 입꼬리는 비틀어 올리며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을 백지의 편지를 양손으로 들어올려 천천히 찢었다.)
 
흩날리는 새하얀 편지봉투 조각들이 눈처럼 휘날립니다.
 
그와 함께 벚나무의 하얀 꽃잎들도 휘날립니다.
 
무엇이 종이이고, 무엇이 꽃잎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풍경입니다.
 
배경이 수십 번, 수백 번은 바뀐 끝에,
 
다시 당신과 슈테른은 노을 진 교실에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던 벚꽃 눈은 ‘현재’에 조금도 남아있지 않지만,
 
당신의 이동에 휘말린 새하얀 꽃잎들이 교실을 부유합니다.
 
슈테른이 손을 뻗습니다.
 
그 손바닥 위에 하얗게 새버린 벚꽃이 힘없이 떨어집니다.
 
두 시선이 얽힙니다.
 
슈테른:저를 싫어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슈테른이 입을 뗍니다.
 
슈테른:단 한 번도 친절하게 대해주신 적 없잖아요.
 
세계의 ‘현재’는 당신의 노력으로 수정되었습니다.
 
벚꽃 눈 사태도, 저주도, 슈테른의 고백도
 
전부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함께 있습니다.
 
수험의 끝부터 졸업식까지의 마법 같은 시간,
 
어쩐지 붕 뜬,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한가한 일상에요.
 
팔랑, 떨어지지 못한 하얀 꽃잎이 허공에 부유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에 가슴께가 괜히 조여옵니다.
 
슈테른은 놓고 온 짐을 가지러 왔을 뿐인 듯
 
제 책상 서랍을 뒤져서 책 몇 권을 꺼냅니다.
 
가방을 챙겨 나가던 슈테른은 문득 뒤를 돌아봅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칩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슈테른이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습니다.
 
그러고는 당신의 머리카락에 묻은 새하얀 종잇조각 한 점을 떼어냅니다.
 
팔랑, 바닥으로 흩어져 떨어집니다.
 
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떨어진 바닥을 내려다보던 슈테른이 천천히 입을 뗍니다.
 
시아록:(네가 떼어낸 종이조각을 눈을 쫓다가 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슈테른:제가 아주 싫지 않으신 거라면…
졸업 후에도... 마, 만나주실래요?
이상하죠, 내내 당신한테는 거절당한 기억밖에 없는데…
어쩐지 시아록 씨가 아주 다정한 사람처럼 느껴져요.
 
말을 끝낸 슈테른이 희미하게 웃습니다.
 
슈테른:곧 봄이라 그럴까요?
 
마음을 적시는 노을이 지면 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또다시 아침이 오겠죠.
 
시아록:(네 말에 속절없이 눈물이 부풀었다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 .... 어디 아픈 곳은 없지?
 
슈테른:(당신의 눈물에 그저 고개를 숙인다) 전 아주 건강해요. 아픈 곳도 없고요...
정말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눈가에 벚꽃잎처럼 조심스럽게 닿는 손길이 느껴집니다.
 
순환이 반복된 끝에 찾아온 봄이 너무 춥지 않았으면 합니다.
 
짧게 피었다가 사라지더라도, 제대로 벚꽃을 볼 수 있도록.
 
 
END 1. 영원한 벚꽃은 없다
 
탐사자, KPC 생환
 
 
그리고……
 
시기는 따스한 봄, 어떤 미래.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병원 옥상 문을 열고 난간에 위태롭게 앉아 있습니다.
 
다리를 흔들 때마다 머리카락이 어깨 부근에서 가볍게 찰랑거립니다.
 
1,200원짜리 크림빵을 마지막 한 입까지 꼭꼭 씹어 먹은 고등학생은
 
가방을 열고 작은 유골함을 꺼냅니다.
 
이보미:너무 뭐라 그러진 마, 금방 제자리에 돌려놓을게.
이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지.
 
병원 정원에는 당신에게 말했던 것처럼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벚꽃이 봄바람에 따라 살랑이고 있습니다.
 
청량하게 맑은 하늘에 맞닿은 분홍색 군집이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신은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힙니다.
 
이보미:이걸로 비긴 거야.
죽었다고 도망칠 생각하지 마.
나는 쉽게 포기 안 하니까!
 
Epilogue. 그 벚꽃의 헌정
 

 

 

 

더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B9YAxEbygg8 

 

플레이타임 합산하고 진짜 깜짝 놀랐어요...... 아니 이 심란하고 슬프고 가슴아프고 천장만 보게 되는 세션이 단 7시간만에 끝났다니... 눈을 의심함... 제가 GM인데도 시나리오 라이터님을 고소하고 싶어지는 탁이었네요...... 하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네. 재밌었죠... 진짜 앤캐랑 앤오님께 개못해줘서 올해의 못해줌상을 받아야 할 거 같지만... 앤캐 지문 한 줄 한 줄 날아올 때마다 가슴이 사혼의 조각마냥 흩어졌지만...........  ......... ................... 그래도 우벚세는 갓시날이니까요. 다들 사랑하는 친구와 우벚세를 가세요.